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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소크라테스

[그리스철학] 영웅을 넘어서는 생활의 '달인'

by 홍차영차 2014. 9. 1.

영웅을 넘어서는 생활의 '달인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철학자의 삶 (3)

 

 

현재 우리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일반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국회의원시장대통령 등의 선거에 투표로 참여하는 것이다. 조금 더 확대해 보면 촛불을 가지고 광화문에 서는 모습도 정치 참여라고 볼 수 있다하지만 직업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인으로서 정치 참여는 먼 나라의 일과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매일 매일 촛불을 들고 나갈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하게 민주주의가 꽃피었다고 하는 아테네는 어땠을까?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통해 정치가 삶이 되고 삶이 정치가 되는 방법을 살펴보려고 한다동네 한 구석에서 아무나와 이야기를 했으며한 자리에서 너무나 오래 생각에 잠겨있어서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소크라테스는 상식적으로 정치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아무런 공식적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하지만 역설적으로 소크라테스 자신은 이런 삶이야말로 진정 정치적이었다고 주장한다어떻게 이런 주장이 가능했을까?

 

1. 명예 vs 

 

   vs 

아킬레우스  vs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고결한 정신을 보인다는 점에서 아킬레우스나 아이아스 같은 그리스 영웅들과 비슷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고결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극단으로 가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이러한 마음가짐 때문에 아킬레우스는 분노했고소크라테스는 조국과 목숨을 건 갈등을 일으켰다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자신을 아킬레우스헤라클레스와 연결시키면서 자신도 신의 총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변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듯이 그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영웅에 대한 새로운 도덕적 개념의 수준으로 올라오라고 도전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제시한 새로운 영웅은 전투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거나 도시국가를 위해 맹목적으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아니었다그저 자신의 도덕적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와 아킬레우스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철저히 희생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명예였고소크라테스에게는 그것이 덕이었다따라서 기원전 399년의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영웅에 대한 상충되는 두 가지 생각(명예와 수치를 중시하는 생각과 도덕적 양심의 윤리)이 충돌한 셈이다아킬레우스와 소크라테스는 똑같이 명예와 명성으로 죽음을 보상받았다아킬레우스는 전사로서 복수에 나서야 한다는 규범에 순응함으로써 명성을 얻은 반면소크라테스는 현재의 규범에 맞서 도덕적 신념을 지키며 자기 영혼을 돌봄으로써 불멸의 명성을 얻었다.

     아킬레우스라는 인물은 영광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과 그리스인들의 영혼에 그 어떤 가르침이나 법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다그는 영웅 중의 영웅이며,모든 사람들이 그를 찬양하고 그를 닮으려 했다소크라테스가 싸우고 싶어 했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이제는 호메로스의 영웅들이 중시했던 용기가 아니라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면서 중요해진 '개인'을 포함하는 새로운 개념의 덕이 필요했다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아킬레우스가 상징하는 바는 인생을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을 실천하고 최고의 도시국가를 건설하는데 오히려 해롭다는 것이다그러므로 그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는 아킬레우스 대신 자신을 새로운 인간형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영웅들과는 다른 철학자의 모습으로 행동을 했던 것 같다그는 항복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호메로스는 넘어서는 새로운 인간형의 모습을 끝까지 살아갔다.

 

2. 정치의 달인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철학에 대한 정치의 재판이었고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훌륭한 사람과 훌륭한 시민 사이의 갈등이었다.[각주:1] 소크라테스가 훌륭한 시민이 되려면 도덕적 자율성을 포기하고 정의와 선에 대한 대중적 견해를 받아들여야 했다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정치와 철학 간의 갈등을 통해서 정치적 삶과, ‘정치적인 것의 의미에 새로운 차원을 창조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정치경험을 소개하면서 놀랍게도 자신의 삶을 일종의 정치적 삶으로 규정했고, 정치적인 것의 새로운 의미를 제안한다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첫 번째 정치적 경험[각주:2]으로 500인 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았던 적이 있었음을 밝힌다이런 실제 정치참여는 소크라테스의 삶이 모든 정치참여를 완전히 배제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 30인 과두정시기의 경험이다. 30인의 과두정은 소크라테스와 다른 네 사람들에게 함께 명령하기를소크라테스가 무고하다고 믿는 살라미스의 레온을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부르는 명령에는 복종했지만 과두정의 명령이 부당하다는 이유에서 그 집행명령에는 복종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가 이 예를 든 것은 그의 삶 전체에서 보여주는 정치참여 기피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음을 예시하는 것이었다그러나 이 예는 또한 소크라테스가 제안하는 새로운 정치적인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그럼 어떤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이 집으로 간 행위를 정치적인 경험의 예로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소크라테스는 물론 처음에 30인 과두정의 명령을 받기 위한 소환에 응했다그러나 소크라테스의 강조점은 분명 이 소환에 응한 행위가 아니라 그가 명령을 받고 집으로 간 행위에 있다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그럴만한 도덕적 이유 때문에 집으로 간 행위는 정치참여나 다름이 없다.[각주:3]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정치란 '공식적' 정치의 장에서만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에게 정치적인 것은 제도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의미를 담게 된다.

 

3.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것그것이 바로 정치!

     소크라테스가 제안하는 새로운 정치적’ 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일반적인 정치적 삶과 구별된다. 1) 이 삶은 공식적인 정치참여를 우선시 하지 않는다소크라테스는 정치적 공적 활동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지만그의 삶에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은 선명하지 않다그에서 있어서는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정치적 행위가 된다.  2)또한 그의 삶은 정치의 핵심을 권력과 부명예의 추구에서 영혼의 보살핌으로 전환시켰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서 정치적인 것의 의미는 개인의 삶과 연결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 것이다소크라테스가 제안하는 정치적 삶을 이와 같이 특징짓는다면그의 삶 전체는 어찌보면 굉장히 일관성 있는 정치적 삶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철학적 활동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정치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있으며 그는 결국 새로운 형태의 삶의 방식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는 변론을 통해 무죄로 방면되는 데는 실패했지만새로운 정치적 삶이 어떤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훌륭한 시민과 훌륭한 사람 간의 갈등으로 만들어 졌는지를 이해시키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정치에 대한 고민은 소크라테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공동체 안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우리의 정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투표 이외의 어떤 부분으로도 정치 참여가 어려워진 현실이다또한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치와 철학의 분리 혹은 상호 갈등은 있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이런 상황에서 소크라테스가 보여준 죽음에 대한 태도와 새로운 정치적 삶에 대한 시도는 우리 삶에서 정치와 철학은 분리될 수 없으며분리되선 안된다는 이유를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소크라테스는 <변론>의 마지막 구절을 통해서 이제는 각자가 두려움 없이 자신의 삶을 개척해나가길 촉구하고 있다.

 

    떠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우리는 각자 자기 길을 가겠죠나는 죽음을 향해여러분은 삶을 향해그러나 

    어느 길이 나은지는 오직 신만이 아십니다.”     (<변론>, 42a) 





  1. <소크라테스의 재판Socrates Against Athens>, 제임스 A. 콜라이아코, 김승옥 옮김, 작가정신 참조 [본문으로]
  2. 소크라테스는 그 날의 의장으로 추첨에 의해 선택되었고, 그는 해전에서 패전한 후 전사자들을 유기했다는 열 명의 장군들의 단체처벌에 관한 의제를 상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장군들을 개별적으로 재판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의제의 상정을 끝까지 거부했다. [본문으로]
  3. 플라톤의 <변명>과 소크라테스적 정치적 삶, 박성우, 한국정치학회보 38-2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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