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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플라톤

완벽한 개인, 완벽한 국가!

by 홍차영차 2014. 2. 20.



플라톤의 국가 8~10권

 

1. 이상적 정체, 과연 가능한가?

지금까지 철인정체에 대해서 이야기 해왔다면 8권에서는 잘못된 정체의 네 가지 유형(명예지상정체, 과두체제, 민주정체, 참주정체)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각각의 정체들은 철인정체로부터 점진적으로 쇠퇴되어 감으로써 생긴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방식으로 순위 매기기는 어렵지 않은가 생각된다. 아마도 플라톤의 마음속엔 이미 철인 정치가 완벽한 정체로 자리매김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크기, 시기(설립, 번성, 쇠퇴)에 따라서, 특히 통치자의 수준에 따라서 각각의 정체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정체의 장단점에 대해서는 함께 좀 더 이야기해보면 좋겠다.

여기서는 두 가지 포인트에 눈길이 갔다. 첫 번째는 우리가 현재 가장 좋은 정체로 여기고 있는 민주정체가 참주정체 바로 전 단계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것이다. 꼴찌에서 두 번째! 지금의 민주체제와 플라톤이 언급한 민주정체는 서로 다른 것은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현재의 민주정체는 더 좋은 대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유지되고 있는 형태인가? 두 번째는 과두정체, 민주정체가 붕괴되는 이유로 소크라테스가 말했듯이 각각의 정체가 설립되는 장점으로 작용했던 부에 대한 욕망, 자유에 대한 욕망이 그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곧바로 최악의 단점이 되어 그 체제를 망가트리게 된다는 것. 적절하게 한계점의 위치를 파악하는 시도들, 다시 말해 이 정체들에서도 철학이 제대로 선용된다면 철인 치자까지 가지 않더라도 안정된 행복한 정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국가>를 다 읽고 나니 더 혼동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완벽한 사람이 없을진대 완벽한 정체, 철인 정치를 이상으로 언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역으로 말해서 완벽한 사람이 있다면 어느 정체도 완전하게 운영할 수 있을 것 아닌가?

 


2. 가장 불의한 사람과 가장 올바른 사람 마음의 문제?

드디어 초기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제기했던 질문의 답이 나온다. 가장 불의한 사람과 가장 올바른 사람 중에 누가 더 행복한가. 소크라테스는 참주 정체를 닮은 사람, 참주의 자리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 가장 불의하며 비참한 사람임을 논증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을 판단하는 데에도 국가를 판단하듯이 마음의 눈으로 인간의 성격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우리들은 어린아이처럼 참주제적인 인간들이 과시하는 화려한 외관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을 충분히 꿰뚫어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여기서 잠시 참주제적인 개인을 자세히 살펴보자. 참주제적인 인간이란 개인의 혼에도 여러 가지 예속과 부자유가 충만하며, 개인의 혼의 가장 선량한 부분들은 노예화된 반면, 작은 부분에 불과한 가장 사악하고 가장 광포한 부분이 주인행세를 하는 사람이다. 내면의 참주의 지배를 받는 혼 역시 자신이 원하는 바를 가장 적게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주제적인 인간에게는 두려움, 비탄, 고통이 가장 많다고 이야기 한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간다. 그런데, 지금 이와 같은 이야기를 길거리의 아무에게라도 해준다면, 한 예로 100억 원의 불의한 돈(전제: 불의한 돈이므로 양심의 가책, 두려움, 고통이 존재하지만 법적으로는 문제없음)을 갖는 것과 월세가 없어서 굶어 죽기 일보직전의 삶(전제: 한 평생 선한 마음으로 살아 온 결과로 가난해졌고 사람들은 자신을 무능력자로 보고, 혹은 예비 범법자로 봄)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아마도 100:0이 아닐까. 결론 플라톤은 이데아 세계를 너무 강조하다보니 이생의 삶은 포기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으세요 라고 말하는 건가?




3. 플라톤식 올바름의 조건 비교하지 않기

플라톤은 가장 올바르지 못한 사람으로서 참주 정체를 닮은 사람 혹은 참주를 오래 맡은 사람을 꼽았다. 다시 말해 혼이 가지고 있는 3가지 부분이 혼연 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최대로 분열되고 그 중에서도 본능적인 부분, 동물적인 부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을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 논증했다.

 

이미 4권에서 보았듯이 플라톤이 정의하는 올바름이란 각각의 부분이 그 맡은 부분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여 조화로운 나라 혹은 개인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나라로 보자면 나라 전체가 내부적 갈등 없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지혜롭게 작동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올바름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개개인의 측면에서도 마음에서 각 부분들이 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고 각 부분들이 화목하여 전체적으로 자신을 조화롭게 통솔할 때 마음에는 올바른 상태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의 올바름이 정의되기 위해서는 타자간의 비교가 있어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의 부분들로 비유해 보자면 혈액을 순환하게 해주는 심장이 저 끝의 발톱을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무릎연골이 두뇌와 비교하면서 자기 부분을 자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인간에게 있어 아무리 작은 새끼발톱이 빠져도 극심한 고통이 생기고, 아주 연약한 인대 하나만 끊어지더라도 우리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음을 우린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크기를 키워서 거대한 조직, 국가를 대상으로 이 비유를 확대해 보면 용납하기가 쉽지 않다. 쉽게 말해서 국회의원과 안산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이 서로를 부러워하거나 질투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식 올바름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호 비교가 있어서는 안 되는 법. 인간이라는 유기체 안에서는 가능하지만 국가라는 정체에서, 현실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이런 비교하지 않음이 가능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들이 가장 많이 비교하는 점은 무엇인지 고민해 보면 플라톤의 철인 통치에 한 걸음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

 

국가에서 이야기하는 正義를 다시 정의해 보면 개인에 있어서 올바른 상태(올바름)이란 흔히 생각하듯 타인과의 관계에서 성립하는 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개인 자신의 내면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국가의 모든 개개인이 이런 올바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소수일 수밖에 없다는 수호자 수준의 철학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가? 플라톤의 책들을 좀 더 읽어 보면서 <국가>를 다시 읽어 봐야할 듯하다.


2014. 0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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