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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42

낭독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오늘도 낭독 후에 달걀 후라이를 먹었다.​낭독을 하면 배가 고파진다고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특히 니체의 텍스트를 낭독하고 나면 육체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디론가 뛰어 나가 숲속을 뛰어다니고 싶고, 미친듯이 춤을 추고 싶은 욕망이 솟는다. 근질근질하는 육체를 잠재우기 위해서 오늘 나는 집에서 열심히 '홈트'를 했다. 텍스트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 문자 밑에 있는 힘의 의지가 전달되어야 한다. 번역된 글이 이런 힘을 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마주한 충동은 니체의 것일까. 아니면 환상 속에 내가 만들어낸 것일까. 혹은 니체가 말했듯이 '나는 이전의 모든 사람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사람'인 걸까.​을 다 읽고 마지막 시간이었는데, 에 나온 한 장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 를 .. 2025. 1. 22.
삶과 신화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빛이 없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본다.모호함이 없는 신화는 없다. 고통과 어둠, 불협화음은 신화의 생명력이다. 신화는 어둠 속에서 탄생하고 어둠 속에서만 생명력을 가진다. 모든 것을 밝은 빛 아래 샅샅히 드러내겠다는 것은 삶에서 단 한 순간의 고통도 제거해버리겠다는 과욕일 뿐이다.신화가 몰락했다는 것은 예술의 몰락이다. 그리고 어떤 신화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삶은 관념 되어버린다. 분석되고 해체된 삶에는 "다음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은 어떤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예술은 베일 위에 형상을 드러내지만 또한 베일 속에 어둠을 만들어낸다. 예술은 어둠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각하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다. .. 2025. 1. 1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완독 - 황금의 암호 낭독을 마쳤다.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거의 전반적으로 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낭독을 하면서 몸에 남은 흔적이 거의 없는 느낌이다. 혼돈 속에서 책을 읽었고 다 읽고 난 뒤에도 혼란스러웠다. 잡스러운 메모들의 기록이었을까?​니체가 을 쓰기 전에 썼던 책들은 이와 같은 경구 스타일이 아니었다. 첫 책이었던 (1872)은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의 속도를 가지고 있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논문이고, (1876) 역시 전형적인 논문의 형식을 띄고 있다. 이 책을 쓰면서 니체는 그동안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바그너, 쇼펜하우어에게서 멀어져갔다. 아니 그들의 철학과 음악을 뚫고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를 실험하고자 했다. Ⅰ,Ⅱ가 그 실험의 결과였던 것 같다. 이전과 다르게 짧은 경구들로 이.. 2024. 10. 28.
도덕의 계보학 - 니체 사상의 모든 것 동정과 동정 도덕의 가치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처음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 의문부호 자체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한번 이 문제에 매달려 의문을 던지는 것을 배운 사람은, 내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 어마어마하게 새로운 전망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의 가능성이 현기증처럼 그를 사로잡으며, 온갖 불신, 의혹, 공포가 솟아올라 도덕에 대한, 모든 도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 마침내 새로운 요구가 들리게 된다. (니체 서문 344쪽)​오늘 새벽 낭독 여섯번째 텍스트인 를 다 읽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읽었다. 다 읽었는데 뭔가 좀 찜찜하다. 읽었는데 읽은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왜냐하면 이 책은 - 함께 낭독했던 친구들도 말했듯이 -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서 낭독성이 .. 2024. 7. 31.
증명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9장 제목은 '고귀함이란 무엇인가'이다. 니체의 다른 어떤 책을 보더라도 이보다 더 명확하게(?) 고귀한 것에 대해 말해주는 텍스트는 없다. 여기서 고귀한 자란, 강자, 위버멘쉬, 차라투스트라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알듯말듯한 비유를 통해서 말하던 니체는 이곳에서 너무나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런데 니체가 묘사하는 고귀한 자, 주인도덕의 모습은 점 당황스럽다. 여기에는 이전의 어떤 근거도 없고 논증도 없다. 선언, 선포만 있을 뿐이다.​"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리스 취향은 변증법에 유리하게 돌변했다 : 그때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엇보다도 고귀한 취향이 정복되었다 : 천민이 변증법을 수단으로 삼아 상부로 올라섰다.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변증법적인 수법이란 것은 건전한 사회에서는 거부되었다;.. 2024. 7. 8.
감각도 새로운 것을 적대시하고 혐오한다 세계는 텍스트이고, 세계는 그 자체로 오류다. 의식은 거짓이고 의식적 사유란 타락이자 위조이다. 그리고 의식은 질병이다.​니체가 하는 말을 읽고 있으면 이 말이 단순한 비유인지 진짜 세계가 오류라고 생각하는건지 헷갈릴때가 많다. 또한 이런말을 믿게 되면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의심이 생기도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불확실하게 느낀다. 니체를 읽게 되면서 더욱 불안하고 혼돈 속에 있게 되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니체가 원한 것은 우리의 불안이 아니다. 혼돈 속에서 절망하면서 사는 것은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그저 세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자신이 파악하고 경험한 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출발은 바로 내가 경험하는 세계와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이 대부분 오류이고 위조.. 2024. 6. 19.
위대한 사냥, 위험한 사냥터 - 의지의 심리학 '선악의 저편'은 블루오션이다.​이전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광대한 영역이고, 거기서 사냥할 것들은 무한하다. 학자들은 그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들이 지금까지 갈고 닦은 시각과 후각은 이 지역에서는 쓸모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술은 이 지역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힘에의 의지, 무의식적 주체, 충동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이성적 감각으로는 보이지 않고, 인과적 사고로서는 추론할 수 없다. 새로운 감각과 시선이 필요하다. 한 번도 체혐해보지 못한 것들이기에 위험하고 상처를 입고 고통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곳에서 얻을 사냥감(보물들)에 비교할 수는 없다. 블루 오션! 수백의 몰이꾼과 사냥개가 필요한 이유다. ​미래의 철학자들, 자유정신의 소유자들에게 이곳은 '위대한 사냥터'.. 2024. 6. 16.
사물과 대화를 시작해봅시다 숲속을 산책한다.계속 걷다보면 어느 순간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나무가 전하는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면 불안은 사라지고근심걱정의 무게도 줄어든다.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러한 정신공간은 지금 인정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어주는 척하면서 센치하다고 말할뿐이다. 조금 더 진진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신과에 가볼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오로지 인간만이 생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렇게 인간만이 정신적인 것을 가졌다고 말하는 순간 삶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타자(사물)과의 관계 역시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이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도 시선을 느낀다. 책장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고, 기하학적 무늬의 벽이 나를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건 그냥 벽일 뿐이야!.. 2024. 5. 31.
"육지"는 이제 없다 ""육지"는 이제 없다."라는 문장이 현재 우리의 마주한 상황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니체를 읽다보면 들뢰즈가 리좀적 사유나 기관없는신체, 노마드와 같은 개념을 말한 이야가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된다. 리좀적 주체로 살기는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기관없는신체가 되라는 것은 '나'로서 살지 말라는 것 아닌가? 부랑자처럼 살아갈 수 없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불평은 마치 돌아갈 "육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향수'에 사로잡힌 것과 같다는 것.​"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를 죽이고 나서 "신은 죽었다"라고 자유를 외쳤을지 모르지만 실상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지평선"을 지워버린 것이고, 태양으로부터 벗어난 지구에 타고 살게 된 상황이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 2024. 5. 29.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주소서! 은 말 그대로 서광(曙光), 새벽 동틀 무렵의 빛을 말하는데 직접 경험해보면 아침놀의 느낌은 저녁놀과 상당히 흡사하다. 그래서 아침놀을 맞이할 때는 이제 하루가 끝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혼란스럽게 느끼기도 한다. 이럴 때 다시 한 번 힘을 내야 한다.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고 어둠이 걷히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만이 가득찬 것 같은 순간! '아침놀'은 이제 막 깨어난 새벽이다. ​은 1881년쯤에 씌어졌는데, 니체의 첫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1874), (1875)을 쓰고서도 몇 년이 지난 후이고 바그너와도 완전히 결별하고 자신의 질문을 명확히 갖고서 자신만의 대답을 하려는 첫 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런만큼 아주 힘차고 강렬하며 말에 냉기가 느껴질만큼 충격적이기도 하다.서문을 보면 자신이 .. 2024. 5. 28.
하나의 '질병'으로서 의식 첨언이 필요 없는 글이 있다. 니체의 354번이 그 중 하나다. 옮겨적다보니 전체의 반 이상을 그대로 발췌했다. 이성적인 생각이라는 의식은 "스스로를-의식하게-되는것"이다. 슬쩍 살펴보면 의식을 갖는다는 것, 의식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특성을 점점 더 잘 알게 되면서 정체성을 갖는 개인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들어있다. 분명히 의식적이 되는 것은 '개인'이 되어가는 과정이지만 정반대로 의식적이 될 수밖에 없던 압력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집단적'이기 때문에 발생했다.​우리의 의식은 언어(문자)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고, 비슷한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우리는 원래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고 기억하며 행동할 수 있었다. 아니 조금 근본적으로 우리는 단어 없.. 2024. 5. 25.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124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방에서 나와 “나는 태양이 뜨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바퀴를 멈출 수 없으면서도 “나는 바퀴가 구르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격투에서 져 쓰러져 있는 사람이 “나는 여기에 누워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누워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우리는 이렇게 비웃지만, 우리가 ‘나는 원한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저 세 사람과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가? (니체 142쪽)   마당이 있어서 좋은 점은 뭔가를 불태울 수 있다는 것.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마을마다 절기마다 뭔가를 태우는 의례가 있었다. 논에 남은 풀들을 불태우기도 하고, 쥐불놀이를 하면서 .. 2024. 5. 12.
니체의 신약성서 해석 지하로 파고들어간 니체가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기독교라는 바위였다.어마어마한 두께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를 가진 기독교라는 토대를 부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밑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 다른 도덕들과 기준들도 인간을 옭아매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종교로서의 기독교였으니까. 니체는 여기서 유럽의 근원적인 도덕으로, 절대적인 도덕으로 여겨지는 기독교 교리를 깊이있고 세심하게 다룬다. 니체는 할아버지부터 목사였던 목사집안이었고, 니체가 어릴적부터 공부했던 것 역시 신학이었다. 시대적으로, 사회적으로 또한 개인적으로도 이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었다. "최초의 기독교인"이라는 제목을 가진 68번은 바울신학의 요약이자 현재 기독교 교리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신학적으로 보여준다. (.. 2024. 5. 2.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주소서! 오늘부터 을 읽기 시작했다.다행히 이번에는 세분이나 신청해서 나를 포함해서 4명이 함께 을 읽어나갈 예정이다. https://cafe.naver.com/afterworklab/924 은 말 그대로 서광(曙光), 새벽 동틀 무렵의 빛을 말하는데 직접 경험해보면 아침놀의 느낌은 저녁놀과 상당히 흡사하다. 그래서 아침놀을 맞이할 때는 이제 하루가 끝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혼란스럽게 느끼기도 한다. 이럴 때 다시 한 번 힘을 내야 한다. 더 이상 힘을 낼 수 없고 어둠이 걷히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과 절망만이 가득찬 것 같은 순간! '아침놀'은 이제 막 깨어난 새벽이다.  은 1881년쯤에 씌어졌는데, 니체의 첫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1874), (1875)을 쓰고서도 몇 년이 지난 후이고 바그너와도 완전.. 2024. 4. 29.
이상한 사람은 없다 이에 반해 선과 악의 대립은 다른 기원을 갖는다. ... 고대 그리스에서 귀족들은 자신들을 ‘우리 진실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어디에서든 도덕적인 가치 표시가 먼저 인간에게 붙여지고 나중에 비로소 파생된 방식으로 행위에 붙여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 고귀한 종류의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한 도덕은 자기에 대한 친미다. 충만한 느낌, 넘쳐흐르려고 하는 힘의 느낌, 고도의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베풀어주고 싶어하는 풍요로움의 느낌이 그런 도덕의 전경에 드러나 있다. 고귀한 인간도 불행한 자를 돕지만 동정에서가 아니라 넘쳐나는 힘에서 비롯된 충동에서 돕는다. 고.. 2021. 7. 30.
역사의 모든 이름과 영원회귀 역사의 모든 이름과 영원회귀 : 3장, 5장 강조돼야 하는 것은 주어진 동일성의 상실이다. ‘신의 죽음’(책임 있는 자아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신의 죽음)은 영혼에게 니체의 영혼의 다양한 기분들 안에서 이미 감지된 모든 가능한 동일성들을 연다. 영원회귀의 계시는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한 동일성들을 차례차례로 현실화 한다. “역사의 모든 이름들, 결국 그것은 나다.” ( 86쪽) ‘영원회귀’ 하면 떠오르는 것은 “네가 지금 살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로 시작하는 341절이다. 동일한 것의 영원한 반복! 여기에서 나는 주사위 놀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지금 이 놀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가능성, 되어진 것, 되어갈 것, 그.. 2021. 6. 15.
악순환과 영원회귀 악순환과 영원회귀 - 신체의 관점에서 망각과 무의식 속에서 드러나는 자아 :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2장 내가 얼마나 충실하게 사유부재의 프로그램을 철저히 수행했는지를 자네는 상상할 수 없을 걸세. 내게는 그것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 있네. 왜냐하면 ‘사유의 이면에는’ 두려운 고통의 발작이라는 ‘악마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네. 생-모리츠로부터 자네에게 보낸 초고는 아주 비싸게, 고통스럽게 대가를 지불하고 쓴 것이라서, 만약 피할 수 있다면 이런 대가를 지불하고 쓰려는 사람은 아마 누구도 없을 걸세. 이제 그것을 다시 읽는 것은 너무나 긴 단락과 괴로웠던 기억 때문에 나에게 종종 공포를 불러일으킨다네. … 이걸 정서할 때마다 나는 매번 욕지기를 느꼈다네. … 쓰기를 마친 후에 사유들의 연관성은 내 기억에서.. 2021. 6. 10.
강자적 삶의 방식으로 가는 길 강자적 삶의 방식으로 가는 길 - 문화에 대항하는 투쟁 : 피에르 클로소프스키, 1장 얼마나 오래전부터 나는 내 자신에게서 생성의 완벽한 무죄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며 나는 이미 얼마나 많은 특이한 길들을 지나왔던가! 처음에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는 것이 내게는 올바른 해결책처럼 보였다. “일종의 예술작품과 같은 것으로서의 실존은 전혀 도덕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덕 자체가 현상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죄의식의 모든 개념에는 객곽적으로 어떤 가치도 없다. 그러나 주관적으로 모든 삶이란 필연적으로 부당하고 비논리적이다.” 그리고 마침내, 세번째에 나는 모든 인과관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목적을 부정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2021.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