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과 동정 도덕의 가치에 관한 이러한 문제는 처음에는 단지 개별적인 문제, 의문부호 자체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한번 이 문제에 매달려 의문을 던지는 것을 배운 사람은, 내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이 그에게도 일어나게 될 것이다 : 어마어마하게 새로운 전망이 그에게 열리고 하나의 가능성이 현기증처럼 그를 사로잡으며, 온갖 불신, 의혹, 공포가 솟아올라 도덕에 대한, 모든 도덕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 마침내 새로운 요구가 들리게 된다.
(니체 <도덕의 계보> 서문 344쪽)
오늘 새벽 낭독 여섯번째 텍스트인 <도덕의 계보>를 다 읽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읽었다. 다 읽었는데 뭔가 좀 찜찜하다. 읽었는데 읽은것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왜냐하면 이 책은 - 함께 낭독했던 친구들도 말했듯이 -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 중에서 낭독성이 가장 떨어지는 텍스트였기 때문이다. 이전에 읽었던 텍스트들은 그저 소리 내서 읽는 것만으로도, 낭독하는 것만으로도 신체와 사유가 고양되었다면 <도덕의 계보>는 좀 달랐다.
<도덕의 계보>는 니체 초기의 텍스트인 <비극의 탄생>이나 <반시대적 고찰> 이후에 처음으로 다시 만나게 된 분석적이며 체계적인 형식의 '논문'이다. <차라투스트라>를 비롯해서 이전에 읽었던 니체 중기의 책들은 대부분 잠언이나 경구의 스타일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낭독하는 맛'이 난다. 낭독으로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체적 고양을 경험할 수 있다. 묵독으로는 알 수 없는, 내용과 의미에 대한 분석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층을 낭독을 통해서 도달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도덕의 계보>는 치밀한 논리와 분석을 통해서 지금까지의 '도덕'을 해체한다. 일반적인 산문보다 더 읽히지 않은 것은 아마도 직관적인 도약 혹은 경구적인 스타일이 분석과 논리적 전개 과정 속에서 불쑥불쑥 올라오기 때문이다.
다른 면에서 보면 <도덕의 계보>는 니체 사상의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듯 하다. 명확하게 체계적인 전개라고 하지만 1논문에서부터 3논문까지의 전개는 이전에 전개해온 사상의 전개가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1논문:선과악, 좋음과 나쁨, 2논문 :죄, 양심의 가책, 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낭독만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도덕의 계보>는 니체가 철학을 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품고 있던 질문, 삶에 대한 태도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위에 인용한 서문을 보자. 니체 말대로 '도덕의 가치'에 대해 매달리게 되면, 여기에 질문을 갖게 되는 순간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어마어마한 새로운 전망"이 열린다고 표현했지만, 끝도 보이지 않는 '무시무시한 심연'이 열린 것 같은 공포감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자기를 구성한다고 생각했던 모든 토대들이 흔들리고 무너지면서 이전에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생각하기를 회피했던 질문과 마주서게 된다.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면서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이것은 해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더욱 거대한 ‘헛되다’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유일한 의미였다. ……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이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
(<도덕의 계보> 제3논문 28절 539~540, 541쪽)
3논문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좀 더 빠르게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끝맺는다. 지식에 대한 의지, 자기 인식의 정신공간, 의미와 내용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고통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만약 고통의 의미나 목적이 환히 밝혀진다면 우리는 의지적으로 고통을 바라고 찾기도 한다.
문자와 정신공간이라는 논의를 가져와 보면 니체의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무엇인지 좀 더 확실해진다. 문자의 발명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의식)을 갖게 되었다. 당연히 문자 이전의 인간들은 (무의식과 의식으로) 분리되지 않은 총체적인 존재였다. 이 존재는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신(화)적이며 마법적 세계를 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자가 발명되고, 점차적으로 문자를 세밀하게 쓸 수 있는 기술(visual text)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무의식과 분리된 의식적 정신공간, 데카르트적 정신공간을 갖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자아 정체성이 뚜렷해지면 타자들과의 다른 자기를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런 정신공간을 갖게 된 인간들은 태생적인 딜레마를 갖게 된다. 문자성의 세계에서 자아 정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속마음과 행동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 근대적 인간, 이성적 인간, 문자적 인간이란 한 마디로 데카당적 존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간극을 매우기 위해서 수많은 시도들이 행해졌다. 어느 때에는 종교가 또 다른 때에는 과학과 철학이 그 역할을 담당하려고 했다. 어디에서든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목적을 찾지 못하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통에서라도 의미와 목적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죽을수도 있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라도 여겨졌던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도덕의 계보>는 1887년에 쓰여졌다. <차라투스트라>를 마무리하고, <즐거운 학문>의 5부를 쓴 뒤에 <선악의 저편>에 이이서 쓴 책이다. 니체는 이후에 '힘에의 의지'라는 책을 쓰려고 했지만 쓰지 못했다. 다음해인 1888년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니체대 바그너>와 같은 책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도덕의 계보>는 어떤 시기를 매듭짓는,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낭독을 하면서 니체 전작을 읽다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이는 것 같다. 예전에 읽는 때 <도덕의 계보>는 단순하게 '도덕'에 대한 역사를 말한 텍스트라고 생각했는데, 니체 사상의 총체가 들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낭독의 힘이기도 하고, 전작은 연속해서 읽기 때문인것 같다. 차분히 1논문, 2논문, 3논문에 대한 글들을 정리해 봐야겠다.
'니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완독 - 황금의 암호 (3) | 2024.10.28 |
---|---|
증명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1) | 2024.07.08 |
감각도 새로운 것을 적대시하고 혐오한다 (0) | 2024.06.19 |
위대한 사냥, 위험한 사냥터 - 의지의 심리학 (0) | 2024.06.16 |
사물과 대화를 시작해봅시다 (0) | 2024.05.3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