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우리는 태양이 솟아오를 때 방에서 나와 “나는 태양이 뜨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바퀴를 멈출 수 없으면서도 “나는 바퀴가 구르기를 원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비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격투에서 져 쓰러져 있는 사람이 “나는 여기에 누워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누워 있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다. 우리는 이렇게 비웃지만, 우리가 ‘나는 원한다’라는 말을 사용할 때 저 세 사람과 다른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고 할 수 있는가? (니체 <아침놀> 142쪽)
마당이 있어서 좋은 점은 뭔가를 불태울 수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서도 마을마다 절기마다 뭔가를 태우는 의례가 있었다. 논에 남은 풀들을 불태우기도 하고, 쥐불놀이를 하면서 놀기도 하고, 일부러 태울 것을 모아서 마을 전체가 축제를 지내기도 했다. 아니 집집마다 아궁이를 가지고 있었으니 따로 불피울 필요가 없었을수도. 일종의 액땜이기도 하고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서로에게 쌓였던 감정들을 털어내기도 하고 또 마음과 의식을 정화했던게 아닐까. 현대인들이 불멍을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우리도 절기마다 거대한 불을 피워놓는 의례를 해보면 좋지 않을까.
요즘에는 가끔 해가 지고 나면 마당에서 뭔가를 태울 때가 많다. 여기 저기 널려 있는 마른 풀들과 나무를 모아서 태우다 보면 마음이 풀린다.
마음이 풀린다기보다 나를 억누르던 의식의 창이 사라지는 느낌이 든다. 계속해서 솟아오르는 불을 보고 있노라면 무의식적인 내가 자연스럽게 전체를 차지하게 된다. 불은 이렇게나 매혹적이다. 이렇게 뭔가를 태우다 보면 끊임없이 계속해서 태우고 싶다. 여기 저기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태우고 내 안의 의식들까지 모두 허물어뜨리고 싶은 욕망이 솟는다.
오늘 읽은 <아침놀>에는 빼놓을 부분이 없었다.
주체, 의지, 자아, 목적, 책임과 충동... 하나 하나 적다 보니 거의 읽은 부분에 반은 필사한 것 같다. 왜 그렇게 자아, 주체, 의지의 부분에 집착하냐고? 얼굴표정하나 편하게 하지 못하는 나를 볼 때마다 이 의식의 긴장감을 태워버리고 싶기 때문이다. 세미나를 하면서도, 낭독을 하면서도 의식을 놓지 못하는 나를 보게 된다. 낭독을 하면서도, 단어와 문장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다른 생각들이 끊이지 않는다. 온전하게 그 소리에만 집중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으면서 온전히 하나로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바라보고 표현하고 싶다.
니체 역시 이런 자기, 주체를 보면서 실험하지 않았을까.
불멍을 하다보면 다채로운 불의 형태에 매혹당한다. 형태는 계속해서 변하고 그 재료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색감, 밀도도 달라진다. 꺼질 듯한 불이 살아나기도 하고 태산처럼 올라가던 불이 갑자기 꺼지기도 한다. 그리고 재료가 다 타고 나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사라진다.
주체와 자아란 불같은 것이 아닐까.
일단의 재료를 가지고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나서 사라지는 것 하지만 다른 시기에 다른 육체를 만나서 다시 일어나는 것.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저 현재 연결된 재료가 소진된 것일뿐 다른 불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서로 연결된 존재?
<아침놀> 128번의 꿈과 책임을 되새기고 싶다.
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듯, 사실 깨어나서 생기는 모든 일에서도 책임이 없다는 것.
위스키 한잔을 마시면서.
128 꿈과 책임
어떤 것도 그대들의 꿈보다 그대들을 잘 나타내주지 못한다! 그대들의 꿈이야말로 바로 그대들의 작품이다! 소재, 형식, 지속의 정도, 배우, 관객까지 - 이 희극에서는 이 모든 것이 그대들 자신이다! … 그리고 우리는 오이디푸스조차, 저 현명한 오이디푸스조차 자신이 무슨 꿈을 꿀지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 오이디푸스는 옳았다는 것, 즉 우리는 틀림없이 자신의 꿈에는 책임이 없지만 이와 똑같이 우리가 깨어 있을 때 행한 것들에도 책임이 없다는 것이며, 자유 의지론이란 인간의 긍지와 힘의 감정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1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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