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언이 필요 없는 글이 있다. 니체의 <즐거운 학문> 354번이 그 중 하나다. 옮겨적다보니 전체의 반 이상을 그대로 발췌했다.
이성적인 생각이라는 의식은 "스스로를-의식하게-되는것"이다. 슬쩍 살펴보면 의식을 갖는다는 것, 의식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자신의 특성을 점점 더 잘 알게 되면서 정체성을 갖는 개인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역설이 들어있다. 분명히 의식적이 되는 것은 '개인'이 되어가는 과정이지만 정반대로 의식적이 될 수밖에 없던 압력은 우리들이 너무나도 '집단적'이기 때문에 발생했다.
우리의 의식은 언어(문자)와 비슷한 특성을 갖고 있고, 비슷한 발전 과정을 거쳐왔다.
우리는 원래 단어가 의미하는 그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고 기억하며 행동할 수 있었다. 아니 조금 근본적으로 우리는 단어 없이도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고 기억하며 행동할 수 있었다. 온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는 의식과 무의식의 구분은 없었고, 행동하는데 있어서도 마음가는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구태여 의식(문자)이라는 "거울에 비치는 모습"을 볼 필요가 없었다. 자신에게 느껴지는 감각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또한 느껴지는 감각 그대로는 표현할 수 있었다. 비언어적인 감각과 비언어적인 표현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언어가 생기면서, 다시 말해 스스로를-의식하게 되면서 우리는 비언어적인 감응이 무언인지 무능해졌고, 비언어적인 표현을 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스스로를 인식한다는 것은 머릿 속에 떠오른 생각을 문자로 고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언어로 소통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독특한 부분이나 구체적인 상황들은 배제를 뜻한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언제나 "비개인적인 것"이고, "평균적인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의식을 갖게 되면서 점점 더 정교하게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지만 의식의 복잡성이 높아지면서 점점 더 "피상적이며, 일반적이고 범속해진" 표현만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의식되는 세계는 "피상적 세계, 기호의 세계, 일반화되고 범속해진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들이란 일종의 타락, 왜곡, 오류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의식이 점점 더 높아질수록 왜곡된 세계를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니체가 "의식은 하나의 질병"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인식의 기원에 대한 부분을 조금 더 살펴보자. 인식이란 "그것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경탄하지 않는 것, 우리의 일상, 우리가 그 안에 묶여 있는 규칙,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또한 " 모든 낯선 것, 익숙하지 않은 것, 의심스러운 것 안에서 우리를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 않는 어떤 것을 찾아내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이상하게 볼 것 없다. 우리가 그동안 받아왔던 교육들, 생활하면서 일하면서 듣는 모든 말들이 바로 이것들이다. 흥분하지 말고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해라, 혹은 화내지 말고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말들은 결국 삶에서 모든 경탄과 감동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식 이전으로 돌아가야할까. 니체 역시 반복해서 말한다. 원시 시대로, 언어 이전 혹은 의식의 탄생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에덴동산처럼 좋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결코 돌아갈 수 없으니 현실에서 만족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아니다. 의식 이후, 언어 이후의 세계는 또한 의식때문에, 언어와 문자 덕분에 열려진 세계,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
354 “종種의 수호신”에 대하여
의식(보다 바르게 말하자면 스스로를-의식하게-되는것)의 문제는 우리가 어느 정도로 그것 없이 지낼 수 있는가를 파악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 요컨대 우리는 그 각각의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의욕하고, 기억할 수 있으며, 또한 “행동”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의식에 들어올” 필요가 없다. 우리의 삶 전체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339
… 의식이 대체로 잉여적인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 걸까? 내가 보기에 의식의 정교함과 강함은 언제나 인간의 전달-능력과 비례하며, 이 전달-능력은 다시금 전달의 필요에 비례하는 것 같다. … 욕구와 필요로 인해 인간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고 서로를 빠르고 섬세하게 이해하게 되면, 결국 이러한 전달의 힘과 기술이 넘쳐나게 되며, 이와 동시에 이 능력이 점차로 축적되어 이 능력을 낭비하는 상속자가 나타나게 된다. ( - 소위 예술가들이 이 상속자이며, 웅변가, 설교자,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
의식 일반은 오로지 전달의 필요에서 오는 압력에 의해 발전된다. - 의식은 원래부터 오로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필요하고 유용한 것이며, 이러한 유용성의 정도에 비례하여 발전된다. 의식은 원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결망이다. - 의식은 오로지 연결망으로서만 발전된 것이며, 따라서 고독한 은자나 야수적 인간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행동, 사상, 감정, 운동이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게 된 것은 지극히 오랫동안 인간을 지배해온 “필연”의 결과이다. 가장 많은 위협 속에 놓여 있는 동물인 인간은 도움과 보호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신과 동류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표현하고 이해시킬 줄 알아야 한다. - 이 모든 것을 위해 인간은 우선 “의식”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결여된 것을 “아는 것”, 자신의 느낌을 “아는 것”,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아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생명체들처럼 인간은 항상 생각하지만 그것을 알지는 못한다.
의식된 생각은 그 중에서 가장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이 가장 피상적이고 가장 조악한 부분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 - 왜냐하면 이 의식된 생각은 오로지 언어, 즉 전달의 기호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의식의 기원이 드러난다. 한 마리도 말해 언어의 발전과 의식은 발견은 (이성이 아니라 단지 이성이 의식된 것) 나란히 함께 이루어진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눈길, 압력, 몸짓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 인상을 의식하는 능력, 감각 인상을 고정시키고 그것을 우리 외부에 존립시키는 능력은 기호를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할 필요가 늘어남에 따라 함께 증가해왔다. 기호를 창안해내는 인간은 동시에 자신을 더욱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 인간이기도 하다. 사회적 동무로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341
… 이제 파악했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상은 의식이 인간의 개인적 실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내재한 공동체와 무리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의식은 공동체와 무리를 위해 유용성을 지니는 한에서만 세련된 발전을 이룬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가능한 한 개인으로서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최선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해도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비개인적인 것, “평균적인 것”뿐이다.
…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근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일하며, 무한히 개별적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의식으로 옮겨지는 즉시 그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현상론이며 관점주의이다. 동물의 의식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수반한다.
우리에게 의식되는 세계는 피상적 세계, 기호의 세계, 일반화되고 범속해진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된 모든 것은 평범하고, 희미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이며, 기호, 무리의 표식이 된다. — 의식된 모든 것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타락, 위조, 피상화, 일반화가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의식의 증가는 위험한 것이다.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심지어 의식이 하나의 질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리는 인식을 위한, “진리”를 위한 기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무리, 종에 유익한 만큼만 “안다”. (혹은 믿거나 상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용성”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도 결국 믿음, 상상,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우리를 몰락으로 몰고 갈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니체 <즐거운 학문> 342쪽)
'니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지"는 이제 없다 (2) | 2024.05.29 |
---|---|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주소서! (1) | 2024.05.28 |
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0) | 2024.05.12 |
니체의 신약성서 해석 (0) | 2024.05.02 |
내가 나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주소서! (0) | 2024.04.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