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텍스트이고, 세계는 그 자체로 오류다.
의식은 거짓이고 의식적 사유란 타락이자 위조이다. 그리고 의식은 질병이다.
니체가 하는 말을 읽고 있으면 이 말이 단순한 비유인지 진짜 세계가 오류라고 생각하는건지 헷갈릴때가 많다. 또한 이런말을 믿게 되면 내가 사는 세계에 대한 의심이 생기도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불확실하게 느낀다. 니체를 읽게 되면서 더욱 불안하고 혼돈 속에 있게 되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니체가 원한 것은 우리의 불안이 아니다. 혼돈 속에서 절망하면서 사는 것은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니체는 그저 세계와 자신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자신이 파악하고 경험한 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 출발은 바로 내가 경험하는 세계와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이 대부분 오류이고 위조이며 일종의 타락이라는 점이다.
<즐거운 학문>의 354번 "종의 수호신"에 대하여를 보면 단도직입적으로 의식은 거짓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의식 그 자체가 일종의 질명이라고 선언한다.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온 모든 것들은 일종의 단순화, 일반화를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 의지의 충동 그대로를 문자로 표현하는 방법은 없다. 대신 일종의 타락을 댓가로, 마치 모든 사물들이 공기 중에 나오면서 산화과정을 겪으면서 변조되는것처럼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선악의 저편> 192번에서는 단순히 의식과 사유만이 아니라 신체적 감각들도 일종의 오류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있는 그대로 감각하지도 못한다는 말!
"우리의 감각도 새로운 것을 적대시하고 혐오한다"
근대적 확실성의 대부분은 시각에 의존한다. 눈으로 직접 내가 봤다고 하면 아무리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증거를 대더라도 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귀신조차도 시각적으로 내가 봤다면 지울 수 없는 충격으로 계속해서 영향을 준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의 시각이란 "이미 자주 만들어낸 적이 있었던 이미지"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새로운 인상을 확실하게 붙잡"는 것에는 상당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은 일종의 고통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개의 팔과 다리 그리고 모자를 쓴 머리, 옷을 걸쳐 있는 허수아비를 보면 우리는 사사람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또한 말을 들을 때도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말을 듣는다기보다는 이전에 들었던 소리들을 조합해서 듣는다. 외국 팝송들 밑에 한글을 써 놓으면 분명히 외국어인데도 재미난 우리나라말로 들리는 이유다. 반대로 외국어에 외국어 발음은 자막으로 써 놓으면 방금까지도 우스운 한글로 들렸던 소리가 전혀 다르게 들린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실제로 책에 있는 글자를 있는 그대로 읽으면서 해석하지 않는다. 텍스트에 있는 글자중에 "대략 다섯개" 정도를 제멋대로 선택해 "추측한다." 한 문장 뿐만 아니라 맥락 조차도 이렇게 파악할 때가 많다.
세계가 오류다라는 말, 의식적 사유가 거짓이고 타락이며 일종의 위조라는 말은 비유라기보다는 실재적 현상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내가 감각하는 것도 오류이고, 의식적인 사유도 거짓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이런 사실을 인정할 때야 비로소 니체의 질문들이 이해된다. (음악)예술이 니체에게 그렇게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
192
어떤 학문의 역사를 추적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모든 모든 ‘지식과 인식’이 거쳐온 가장 오래되고 가장 일반적인 과정. 지식과 인식의 맨 처음 단계에서는 성급한 가설, 허구, 선량하지만 어리석은 ‘믿으려고’ 하는 의지 ,회의와 인내가 결여된 상태가 나타난다. 우리의 감각이 섬세하고 충실하며 신중한 인식 기관이 되는 것은 훨씬 나중이지만 그때 가서도 완전하게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시각) 우리의 눈은 어떤 주어진 자극에 반응할 때, 특이하고 새로운 인상을 확실하게 붙잡기보다는 이미 자주 만들어낸 적이 있었던 이미지를 다시 한 번 만들어내는 것을 편하게 느낀다. 전자의 경우가 훨씬 많은 힘과 ‘도덕성’을 요구한다.
(청각) 어떤 새로운 것은 듣는다는 것은 귀에는 고통스럽고 성가신 일이다. 낯선 음악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다른 나라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듣는 소리를 부지불식간에 우리 귀에 보다 친숙한 단어로 바꾸려고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독일인은 아르쿠발리스타(archubalista[석궁])라는 말을 듣고 그것을 armbrust[석궁])라는 말로 바꾸어 버렸다.
우리의 감각도 새로운 것을 적대시하고 혐오한다. ‘가장 단순한’ 감각 과정에도, 나태라는 수동적인 정념까지 포함하여 두려움, 사랑, 증오 증과 같은 정념이 이미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책을 읽는 사람들은 한 페이지에 수록된 개개의 단어들을 다 읽지는 않는다. 이십 개의 단어들에서 대략 다섯 개를 제멋대로 선택해서 이 다섯 개의 단어들에 포함되어 있을 것 같은 의미를 ‘추측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리로 우리는 하나의 나무를 볼 때도 그것의 잎, 가지, 색깔, 형태 들을 정확하면서도 완벽하게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그것에서 나무라는 것의 대개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편이 훨씬 쉬운 것이다.
가장 특이한 체험을 할 때도 우리는 그렇게 한다. 즉 우리는 체험의 대부분을 지어내며 어떤 것을 관찰하든 간에 ‘꾸며내지’ 않는 경우는 없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리고 옛날부터 거짓말하는 데 익숙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보다 고상하고 위선적으로 말한다면, 요컨대 보다 듣기 좋게 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술가라는 것이다.
활발한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나는 종종 상대방의 얼굴이 그가 말하는 사상이나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것으로 내가 믿는 생각에 따라서 명료하면서도 섬세하게 규정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나의 시각은 사실 이 정도로 명료하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그의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나 눈에 담긴 표정의 미묘함은 내가 지어낸 것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상대방은 전혀 다른 표정을 보였거나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니체 <선악의 저편> 아카넷, 제5장 도덕의 박물학)
의식된 생각은 그 중에서 가장 미미한 부분에 불과하다. 심지어 우리는 그것이 가장 피상적이고 가장 조악한 부분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 - 왜냐하면 이 의식된 생각은 오로지 언어, 즉 전달의 기호 속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의식의 기원이 드러난다. 한 마리도 말해 언어의 발전과 의식은 발견은 (이성이 아니라 단지 이성이 의식된 것) 나란히 함께 이루어진다. 여기에 덧붙여야 할 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눈길, 압력, 몸짓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감각 인상을 의식하는 능력, 감각 인상을 고정시키고 그것을 우리 외부에 존립시키는 능력은 기호를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야 할 필요가 늘어남에 따라 함께 증가해왔다. 기호를 창안해내는 인간은 동시에 자신을 더욱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 인간이기도 하다. 사회적 동무로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341
… 이제 파악했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상은 의식이 인간의 개인적 실존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내재한 공동체와 무리의 본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의식은 공동체와 무리를 위해 유용성을 지니는 한에서만 세련된 발전을 이룬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 각자가 자기 자신을 가능한 한 개인으로서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최선의 의지를 지니고 있다 해도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비개인적인 것, “평균적인 것”뿐이다.
… 우리의 모든 행동은 근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이고, 유일하며, 무한히 개별적이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의식으로 옮겨지는 즉시 그것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현상론이며 관점주의이다. 동물의 의식의 본성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수반한다.
우리에게 의식되는 세계는 피상적 세계, 기호의 세계, 일반화되고 범속해진 세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의식된 모든 것은 평범하고, 희미하고 상대적으로 어리석고, 일반적이며, 기호, 무리의 표식이 된다. — 의식된 모든 것에는 근본적으로 커다란 타락, 위조, 피상화, 일반화가 결합되어 있다. 결국 의식의 증가는 위험한 것이다. 가장 의식적인 유럽인들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은 심지어 의식이 하나의 질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우리는 인식을 위한, “진리”를 위한 기관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그것이 인간의 무리, 종에 유익한 만큼만 “안다”. (혹은 믿거나 상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용성”이라고 불리는 것 자체도 결국 믿음, 상상, 그리고 아마도 언젠가 우리를 몰락으로 몰고 갈 치명적인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니체 <즐거운 학문>354 "종의 수호신"에 대하여 中 342쪽)
'니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도덕의 계보학 - 니체 사상의 모든 것 (0) | 2024.07.31 |
---|---|
증명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1) | 2024.07.08 |
위대한 사냥, 위험한 사냥터 - 의지의 심리학 (0) | 2024.06.16 |
사물과 대화를 시작해봅시다 (0) | 2024.05.31 |
"육지"는 이제 없다 (2) | 2024.05.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