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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음악은 언어일까

by 홍차영차 2024. 4. 6.

요즘 서양음악이론을 듣고 있는데 고급화성학중간을 넘어서면서 정리 겸 후기를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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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을 듣는데 음악이론이 필요할까? 혹은 악기를 배우는데 굳이 이론까지 알아야할까?

그리고 음악은 언어일까 비언어일까?

기본적인 화성이론부터 고~오급화성이론까지 접하다 보니 이런 질문들이 생겼다.

일단 지금까지 배웠던 용어들만 간단히 적어보자.

기본화성학 용어는 그래도 알듯하다. 음정(interval), 음계(scale), 반음계(chromatic scale), 으뜸음(도, tonic), 딸림음(솔, dominant), 조성(key), 3화음(triad chord) 완전정격종지(perfect authentic cadent), 반종지(half cadence), 허위종지(deceptive cadence)

여기서부터는 고급화성학이었던것 같다. 7화음(7th chord), 딸림7화음(dominant 7th chord), 부속7화음(secondary dominant 7th chord) 차용화음(borrowed chord), 증6화음(augmented 6th chord), 그리고 오늘 배울 나폴리6화음(Neapolitan 6th chord)

결국은 소리다!

기본화성학이라고 할 수 있는 음정, 음계, 3화음, 종지 이정도만 잘 이해해도 클래식음악을 듣는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 부분에서 들리는 미묘한 느낌이 반음계를 썼기 때문이구나 혹은 여기에서 반종지나 허위종지를 써서 끝난것 같지 않았구나 하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소리를 있는 그대로 잘 들을 수 있다면 듣는 것만으로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내가 들은 화음과 음이 어떤 느낌인지를 좀 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에 대한 용어들, 이론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서양음악이론을 배우면서 가장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은 '듣기', '소리'에 대한 중요성이다. 신기하게도 용어를 모르더라도 실제로 들어보면 장3화음과 단3화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인 반응이기때문이고, 음악, 소리는 머리로 이해하하기보다는 신체적으로 체험되는 차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증3화음과 감3화음까지 들어보면 확실하게 밝은 느낌의 장3화음과 다른 느낌이라는 '차이'를 좀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들은 소리, 귀와 심장에 , 신체 전체에 진동으로 전달되는 소리가 주는 감각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기를 어려워 한다. 용어를 몰라서라기보다는 소리에 대한 신체감각에 대해서 표현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달되는 그대로 말하면 되지만 뭔가 배운(?) 사람들은 항상 의심하고 머리로 판단하면서 확인하고 싶어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는지, 다른 사람도 소리가 '밝게' 들리는지 확인하고, 그에 맞춰서 말하고 싶어한다.

음악이론을 배우면서 소리에 대한 감각이 조금 생겼다. 이론시간마다 피아노로 화음을 치고 느낌을 이야기하면서 나에게 들린 소리에 대해서 말하는 데 거리낌이 사라졌다. 확실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물론 기본적인 음정, 도레미파솔라시도, 도-미-솔과 같은 소리를 실제로 들어보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음악은 언어다

딸림7화음(dominant 7th chord)과 부속7화음(secondary dominant 7th chord)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음악이 굉장히 언어적이라고 느꼈다. 딸림7화음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음악의 끝맺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다. V-I로 끝나도 완전정격종지라고 하지만, V7-I가 되면 더 확실하게 여기에서 끝난다는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V7에 있는 '시'와 '파'가 '도'와 '미'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시->도, 파->미의 방향성이 더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배운 것중에서 가장 신기하고 재미있던 것은 부속7화음이다. Secondary dominant 7th chord - 영어로 하면 이름 자체의 길이도 길어서 뭔가 복잡하고 멋있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V7-I가 나타나면 마무리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뒤에 있는 3화음이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점을 응용한 것이 부속7화음이다. 중간에 마무리도 아니고 주인공도 아니지만 작곡자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그 화음을 으뜸음이라고 가정하고 바로 앞에 이 가상으뜸음에 대한 딸림7화음을 넣어주면 된다. 이렇게 연결된 음을 들으면 잔잔하게 진행되던 소리에서 하이라이트된 영역이 만들어진다.

이후에 배운 차용화음은 이해하기가 더 쉽다. Borrowed chord 말 그래도 같음 으뜸음을 사용하는 서로 다른 조의 화음을 갑자기 사용하는 것이다. 다장조에서 갑자기 다단조의 음을 넣어주면 갑자기 단조의 느낌이 들기 때문에 단조로운 선율이나 구조에 활력이 생긴다. 한 마디로 장조의 밝은 느낌에서 순간적으로 단조의 살짝 우울한 느낌을 주고 싶을 때 차용화음을 넣으면 된다.

딸림7화음, 부속7화음, 차용화음을 보면 음악인데 확실히 수사학적인 방법론처럼 보인다. 음악 역시 언어라고 볼 수 있겠구나. 반대로 언어에는 본래적으로 음악적인 것을 가지고 있다고. (그래서 니체는 비극에 대한 탐구에서 비극은 대화가 아니라 음악이라고 단언!)

음악은 언어가 아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정말 화성학은 언어적 규칙처럼 보인다. 규칙대로 사용하면 원하는 내용과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악을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언어의 특징을 살펴보자.

언어의 목적은 상호소통이다. 특히나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도록 공통의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를 쓰게 되는 순간, 말이나 문자를 쓰는 순간 전달하려는 것과 언어(문자)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 "이 고양이가 참 이쁘네."라고 말하는 순간 배운 사람, 문자를 아는 사람은 그 문자(말)이 주는 일대일대응적 내용에만 집착한다. 말과 문자를 둘러싼 잉여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게 된다. 이 말하는 사람이 남성이고 썸을 타고 있는 여성이 데리고 온 고양이에게 말한 것이라면 여기에는 '고양이', '이쁘다'라는 정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너한테 더 잘보이고 싶어"라든가 혹은 "나도 고양이 좋아하는데 공통점이 있네"라든가. 반대로 "나는 강아지가 더 좋은데, 어떻하지?"라는 감정이 실려 있을수도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에는 이러한 맹점이 있다. 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 언어(문자)를 쓰지만 실제로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 왜냐하면 언어(문자)를 쓰게 되면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도'가 왜곡되고 손상되면서 사용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음악이 언어라고 말할 때 이런 점을 고려해야한다. 현재 도-레-미-파-소-라-시-도라는 7개의 음계를 사용하는데 실제로 국악을 들어보면 이렇게 딱잘라서 음정을 말할 수 없다. 대부분이 국악소리들은 미분적이기 때문이다. '미'에서 시작했을지 모르겠지만 음정은 계속해서 \ / - ~ 이렇게 변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음악, 클래식 음악이 갖는 특징이라고 봐야한다. 음악을 언어적으로만 보면 사실 음악적인 부분의 미소한 부분밖에 향유하지 못하는 것.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 혼란스러울수 있지만 화성학의 규칙들은 법이 아니다. (그리고 당연히 법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이러한 음악적 문법들이 사용된 것은 음악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조 도구들이라고 봐야 한다. (문자에서 띄어쓰기나 마침내, 쉼표가 생긴것은 잘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보조적인 기술이었다.) 음악적 소통은 근본적으로 아주 신체적이기 때문이다. 부감7화음을 여기에서 써서 차이를 만들어야지라고 외워서는 음악을 감각할 수 없다. 바흐,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은 사람들은 감각적이고 마법적이고도 원초적으로 뭔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감각에 의지해서 작곡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음악들은 모범(?)으로 삼아서 조금 더 쉽게 음악을 만들(고 들을 )수 있도록 화성학이 생겼다고 봐야한다. 지금 작곡하는 사람들은 이전의 음악들을 열심히 들을 필요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의 독특한 감각에 대한 신뢰를 가지고 음악을 작곡할 필요가 있다. 앙팡 테리블이라고 불렸던 드뷔시가 왜 그렇게 마음대로(?) 작곡했는지도 이해가 된다.

이전 후기에도 썼지만 그렇다고 음악이론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음악이론을 알게 될 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는 것이고, 음악을 들으면서 감각할 수 있는 영역도 넓어진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말을 하고 문자로 소통하면서 다툼이 생기는 것도 이 부분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음악에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이 함께 있는 것처럼, 언어 자체에도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이 함께 들어 있다. 문자가 주는 확실성의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언어에도 분명히 잉여적인 부분과 전체적인 맥락, 그리고 신체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자가 탄생하면서 이 새로운 문자로 인해서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파동들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이론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만 자신의 감각을 믿으면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라는 음계가 생기면서 미분적인 음악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문자처럼 화성과 대위라는 법칙으로 인해서 더 풍부한 음악적 표현이 가능해졌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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