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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 읽기

프루스트 예술론과 니체의 강자

by 홍차영차 2021. 11. 1.

프루스트 예술론과 니체의 강자

 

 

 

천재의 작품이 즉각적인 찬미를 자아내기 어려운 이유는 작품을 쓴 자가 예외적인 인물로서 그와 비슷한 인물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천재를 이해할 수 있는 드문 지성을 생산하고 또 배양하고 증식하는 것은 바로 작품 자체다. 베토벤의 사중주곡(12번, 13번, 4번 15번) 자체가 오십 년이나 걸려 그 작품을 이해하는 청중을 낳고 길렀으며, 그리하여 모든 걸작이 다 그렇듯이, 예술가의 가치가 아니라면 적어도 지식인 사회에서(걸작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는 폭넓게 구성된, 즉 그 작품을 좋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발전해 나간다. 우리가 후대라고 부르는 것은 작품의 후대를 말한다. 작품 자체가 이런 후대를 창조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작품이 보존되었다 후대에 가서야 알려지는 경우, 그 후대는 작품의 후대가 아니라, 단지 오십 년 뒤에 사는 동시대인들의 모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제 갈길을 원한다면, 작품을 아주 깊은 곳으로 아주 먼 미래의 한복판을 향해 내던져야 한다. 그렇지만 이런 미래의 시간, 걸작의 진정한 전망이라 할 수 있는 미래의 시간을 참조하지 않는 것이 서투른 비평가들이 범하는 실수라면, 미래의 시간을 지나치게 참조하는 것 역시 훌륭한 비평가들이 범하는 위험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187~189쪽)
… 하지만 천재든 그저 재능이 뛰어난 자든 그들을 탄생기키는 것은 남들보다 탁월한 지적 요소나 사회적 세련미가 아니라 그런 요소를 변형하고 전환하는 능력이다. 전구로 액체를 데우려면 가능한 가장 전력이 센 전구를 사용하려고 할 게 아니라, 그 전구가 빛을 그만 내고 대신 열을 내도록 유도해야 한다. 하늘을 날아다니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엔진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 엔진이 지면을 달리던 걸 멈추고 따라가던 방향을 수직 방향으로 돌려 수평적 속력을 모두 상승력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이들은 가장 세련된 환경에서 살고 가장 재치 있는 화술과 가장 폭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그들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멈추고 자신의 개성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만들어, 비록 현재의 삶이 사회적으로 또 어떤 점에서는 지적인 면에서조차 초라하다 할지라도 그 삶을 거울에 반영하는 자이다. 천재란 사물을 반영하는 능력에서 나오지 반영된 광경의 내적인 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권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26쪽)

 

프루스트를 읽다보면 이게 소설인지 철학인지 헷갈릴 때가 많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명확한 뼈대를 갖고 있는 소설이 아니다 보니 더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된다. 이런 점은 프루스트를 읽기 어렵게 만드는 또 한 가지인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프루스트 소설이 갖고 있는 본성적 특이성이다. 이 부분을 세밀하게 읽고 해석하는 것은 프루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를 상상하는 좋은 재료가 된다.

 

프루스트에게 예술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선다. 예술은 그저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삶 그 자체이기도 하고,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수단이고, 삶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드는 유일한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술에 대한 이런 태도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자체가 마르셀이 작가(예술가)가 되어가는 성장 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소설에 나오는 예술론은 소설의 부차적인 측면이 아니라 소설의 핵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수많은 그림에 대한 비유와 비평은 물론이고 뱅퇴유의 바이올린 소나타에 대한 묘사가 끝도 없이 나오기도 하며, 베르고트의 소설에 대한 비평이 십여페이지가 넘게 쏟아져나올 때가 있다. 감각적이며 구체적인 그의 비평과 묘사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그의 이야기에 멀미를 느끼기도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부분에 나오는 베토벤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베르고트 소설에 대한 비평에서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조금 더 세밀하게 알 수 있다. 왜 이렇게까지 길게, 마치 미학 논문 한편이 통채로 들어있는 것처럼 소설을 썼을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우선 (천재적) 예술작품이란 그 시대의 기준을 넘어서야 한다. 이는 시대적인 풍습이나 문화를 반영하지 말아야 한다거나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다. 천재의 작품은 시대적 기준에 맞추어, 기준을 ‘의식’하면서 창작된 것이기보다 스스로가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이다.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은 과거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갈 때가 많다. 분명 삶의 방식과 정신 공간의 변화를 체험하고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거나 과거의 것에 머물러 있으려고 할 때가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전혀 그 시대를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천재의 작품은 자신의 작품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 있는 관중을 스스로 길러내야 한다. 베토벤의 작품이 그랬듯이. 작품은 후대를 길러내면서 동시에 작품을 알아보는 ‘동시대인’을 기다리고 있다. (베토벤의 작품은 근대적 방식의 삶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탈근대적 요소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베르고트의 작품에 대한 묘사는 천재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창조성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창조성이란 이미 “반영된 광경의 내적인 질” - 더 많은 지식이나 얼마나 세련된지 - 에 있지 않다. 예술가는 “자신의 개성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만들어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 구체적인 지식이나 세련미가 떨어지더라도 바로 이 부분에서 창조성이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시대는 열을 내는 전구를 요청하고 있고, 세상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지만 기존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밝은 전구를 만들 수 있을까에만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까지 밝은 전구를 만드는 방식에 익숙해졌기에, 조금 더 밝은 전구를 만들면 열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천재는 거칠고 투박할지 모르지만 “요소를 변형하고 전환”하면서 열을 내는 무언가를 시도한다. 프루스트에게 창조성이란 바로 이것, ‘변형’과 ‘전환’의 능력이 된다. 삶이란 변환하고 전환하는 것이고, 스스로가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프루스트가 진부하고 상투적 표현에 유달리 혐오감을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에게 ‘장대같이’ 내리는 비는 어떤 정서적인 것도 전달하지 못한다.

 

예술론에 대한 프루스트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면 곧바로 니체가 떠오른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제 갈길을 원한다면, 작품을 아주 깊은 곳으로 아주 먼 미래의 한복판을 향해 내던져야 한다.”는 말은 니체 스스로가 먼저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루스트의 예술론은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삶의 방식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니체가 말하는 강자의 삶의 방식은 시대의 기준과 맞지 않을 때가 많다. 강자의 삶의 방식은 시대적 기준에 알맞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넘쳐 흐르는 힘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강자는 고귀한 기준에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가 표현하지 않을 수 없음을 느끼고 표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표현의 방식과 강도는 스스로에게 넘쳐흐르는 힘의지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강자에게도 역시 자신의 개성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과 현 시대를 의식하면서 오염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감각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자부심을 갖고 표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강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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