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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말, 진정 마지막 말, 진정 진정 마지막 말

by 홍차영차 2020. 8. 30.

마지막 말, 진정 마지막 말, 진정 진정 마지막 말

: 모리스 블랑쇼,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11장




“사후 34년 만에 공개된 미셸 푸코의 유작, ‘성의 역사’의 완결편, <육체의 고백> - 육체와 욕망 그 진실을 밝히는 기념비적 대작” - 알라딘(www.aladin.co.kr)의 판촉 문구!


<성의 역사 4권>이 나온다는 문구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썩였다. 마치 이 책을 읽어내면 그동안 읽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푸코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상했겠지만, ‘그’ 책을 읽었다고 해서 완결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마지막 책의 출현으로 인해서 푸코의 앞선 책들은 이전과 전혀 다른 조명 속에서 읽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블랑쇼가 말한대로, 새로운 주석은 또 다른 주석을 부를 뿐이고 서로는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할 뿐이다. 마지막 책이라고, 마지막 말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마지막 말은 있을 수 없다. 어디서나 새로운 말들이 들춰지고 발견된다. 그리고 우리는 빈번히 그 마지막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우리에게 도착하는 진실은 언제나 “찟어진 채로” 도착한다. 


언젠가 본래 상태로 갓 출간된 카프카의 편지를 언급하면서, 나는 사후 출판이라는 성격 때문에 그것이 무한할 수밖에 없듯이, 전집엔 언제나 마지막 권이 빠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카프카에서 카프카로>, 247쪽)


책만이 아니다. 인생은 언제나 사건들로 이어져 있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언제나 지속된다.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방법으로 완결을 추구한다. 깔끔하고 명확한 완결과 완성을 기대하지만 그 작업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삶은 생성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생성 가운데 중단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중단의 생성”이어야 한다. 중단의 생성? 낯설지 않다. 만족스러운 죽음이나 문학은 죽음을 통해서 가능하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생성이 있으려면, 중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카프카는 - 서신이 확인해 주고 있듯이 - 자의적으로 펠리체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지는 않았다. (272쪽)

그는 매번 그러한 결렬을 끝냄의 불가능으로, 보다 근본적으로는 추방의 요구로 받아들이게 된다. (274쪽)

“우리의 삶이 우리에게 소중하다면, 끝내도록 하자.” (279쪽)


자의적으로는 관계를 끊으려 하지 않지만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전개된다. 아니 그렇게 전개시키는 것 같다. 의지적이지 않으면서 중단할 수 있는 방식! 어쩌면 자신의 원고들을 브로트에게 전달하면서, 자신의 원고를 폐기해달라는 행위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폐기를 원하지만 폐기되지를 원치 않는 마음.


어쩌면 “가장 진실된 것은 영원한 싸움, 곧 그것은 끝내기의 불가능성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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