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김영민의 <공부론> 2

by 홍차영차 2016. 5. 12.

예열 없는, 후유증 없는 공부

- 김영민, <공부론> 2-



키워드 : 실명제 공부, 고독의 박자, 시간성의 공부, 심자통, 무의식의 자율성, 생각을 넘어선 생각, 근기와 슬기, 눈밝은 스승, 좋은 몸, 비인부전(非人不傳), 예열 없는 공부, 후유증 없는 공부


공부, 자연의 질서(리듬)에 몸을 맞추다

<호모 쿵푸스>에서 고미숙샘은 공부란 자신의 비전을 발견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공부를 어떤 지식을 더 많이 알아가는 인식론적 접근방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면 <공부론>에서 김영민이 말하는 ‘자연의 질서에 몸을 맞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자신의 비전을 발견한다는 것은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고, 이는 자연과 사람의 신진대사의 과정이다. 그런데 이러한 ‘나’는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는다고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도달해야만 하는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비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를 통해서 어떻게 ‘나’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공부란 사람을 알아가는 것이고, 세상과 관계하는 것이다. 物理와 道理를 깨치는 것! 그 과정 속에서 세상과 리듬을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빠르다거나 느리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자연과 사람들과 속도를 맞추어갈 것인지 그 ‘리듬과 속도’를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공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리듬과 속도는 한 순간에 그것을 ‘알았다고’ 획득되어지지 않는다. 김영민이 말했듯이 “그것은 오랜 생활양식의 물매가 선사한 돌이킬 수 없는 힘”이기 때문에 계속되어진 반복과 연습, 절차탁마의 자기수련askesis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속도를 보면서 느리다고 조급해하지도, 빠르다고 교만해져서도 안 된다. 공부란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명제 공부

실명제 공부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이론을 구축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반대로 ‘하늘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식의 변명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무사와 문사의 태도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걸고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언급하고 있다. 두리뭉수리하게 내것도 네것, 네것도 내것이라는 태도가 아니라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의 말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것! 이는 단순하게 이론을 아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뚫어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선지후행先知後行의 지행일치知行一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知行合一(왕양명)의 태도만이 가능하게 된다. 이론을 안다는 것은 결국 ‘앎이 현실에 닿을 때’에야 나타난다.


공부, 차례와 순서를 아는 것(知所先後, 則近道矣)

“딱딱한 놈들은 대체로 죽을 것들(堅强者死之徒 , 柔弱者生之徒)”이라는 노자의 말처럼, 양식type으로 굳어진 스타일style은 더 이상 공부일 수 없다. 그렇기에 차례와 순서를 안다는 것은 시중時中의 문제가 된다.

차례와 순서가 있지만 이는 정해진 규정이 아니다. 공부라는 일도 결국 사람의 일이다. 스타일을 만드는 일에 이소룡이 유연성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매 순간 어느 것이 우선되는 것인지,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사람’을 잊지 않는 것, 상황과 사정을 헤아리면서도 법도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 그렇기에 차례와 순서를 안다는 것은 시간성의 공부이고 좋은 몸을 만드는 작업이다.


공부란 맨손으로 거대한 공룡을 잡는것?

공부란 맨손으로 거대한 공룡을 잡는 일이다. 인간이 거대한 공룡을 잡는 건 불가능하다. 시간을 들이고, 세심하게 다가갈 때 기회가 생긴다. 다만 “그 놈의 심장(조심! 그것은 여럿이다!)에 깊이 비수를 꽂을 때까지 지혜로운 근기를 잃지 말고 긴 안목으로 시간을 공대”해야 한다. 한 번의 공격으로 공룡을 한 번에 쓰러뜨릴 수는 없다. 공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열이 없는 공부, 후유증 없는 공부?

예열 없는, 후유증 없는 공부는 공부의 안팎이 없는 것으로 공부하지 않을 때 오히려 공부의 속내가 드러난다. 다시 말해서 이는 앞서 ‘근본’을 마주치지 않는 영리한 사람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 내어 이제는 물 바깥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고귀한 인간을 말한다.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생긴 사람에게 물 바깥이라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이런 사람에게는 리듬을 맞추기 위해서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차림새 없는 차림’과 ‘준비하지 않는 준비’가 이루어지는 생활 항상성이 이어진다. 심자통心自通! 책상과 일상을 잇는 일은 수행자에게만 필요하거나 가능한 것이 아니다. 공부하는 모두에게 필요하다.


스승과 제자

요즘은 재주가 너무 빨라서 공부의 길이 스스로 막쳐 버린 꼴이 문제이다. “공부란 엉덩이로 하는 것”이란 말도 있긴 하지만, 재기가 지나쳐 공부에 성급한 학생들은 결실기를 기다리지 못한 채 열매를 고집하거나 결국 옆길로 빠져버리기 쉽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