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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그리스비극

그리스비극 - 오레스테이아 3부작

by 홍차영차 2015. 11. 22.

운명과 의지의 균형을 넘어서는 지혜(logos)

- 오레스테이아 3부작, <아가멤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 <자비로운 여신들> -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폴리스에 존재하는 여러가지 힘들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다. 복수의 여신들로 대표되는 구세계와 제우스를 중심으로 질서잡힌 올륌포스 신들의 대결에, 신들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혹은 주어진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의 갈등 그리고 아테네 제국에서 자신들이 하는 전쟁에 대한 변명 혹은 경고.


아가멤논을 죽이려는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정부 아이기스토스


남편을 죽인 어머니와 어머니를 죽인 아들, 누가 잘못을 했다고 아니면 누가 더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뿌려진 독기’를 처리해야한다는 명령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게 되는 순가’ 그 당사자의 마음속에 새겨지는 것이다. 아가멤논의 명예롭지 못한 죽음을 알게 된 오레스테스는 아폴론의 촉구가 없었더라도 복수했을 것이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오레스테스는 자신의 맘 속에 요동치는 심장을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고, 또한 아버지에 대한 복수 없이는 스스로 어떤 사회에서도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쨋든 3부작의 마지막편인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오레스테스는 이 연속된 복수의 고리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정말 어머니를 죽인 것보다는 아버지를 죽인 것이 더 큰 죄이기 때문일까? 마지막 재판 결과는 단순히 모계 사회에서 부계사회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아이스퀼로스가 호메로스 사회로부터 ‘신의 정의’를 드러내고는 있지만, 여기에 나타난 인간의 행동은 신들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가 동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오레스테이아의 복수는 모두 신들의 이름으로 펼쳐지지만 그 결과는 자신들이 책임져야 했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결정할 때에 있어서 ‘신의 정의’를 두려워 해야 하고, ‘오만함’으로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주장한다. 기원전 458년 도시 국가 아테나이는 델로스 동맹이 아니라 아테네 ‘제국’으로 변모하고 있었고, 거기서 부득이한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아테나이의 모든 전쟁들은 시민들 스스로의 결정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아이스퀼로스는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 ‘신의 정의’를 거울삼아 자신들의 행위를 냉철히 점검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를 죽이고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기는 오레스테스


<자비로운 여신들>에 나오는 아테나이 시민들이 오레스테이아의 행위에 대해서 가부동수의 판결을 내렸을 때, 아테네 여신은 아버지의 복수를 한 오레스테스를 지지를 선언했다. 자신은 어머니 없이 태어났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이는 단순히 부계 사회의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 <오레스테이아> 3부작에서 나오는 아버지,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올륌포스 신들의 강조는 도시국가에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설득의 말’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운 도시국가에서는 시민들의 참여와 아테나 여신으로 대표되는 지혜(logos) 가 중요해지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균형과 지혜(logos)의 중요성. 다시 말해 舊세계를 대표하는 ‘복수의 여신들’과 새로운 질서를 대표하는 젊은 여신 아테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를 바탕으로하는 자연의 질서(physis) 중심에서 이제는 제우스 중심으로 각자의 신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법(logos)  중심으로 사회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듯 하다.


<오레스테이아>는 운명과 자유, 경고와 가르침, 신들의 의지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 균형을 강조하고 있으며, 더불어 시민들의 참여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처음 비극이 상연된 것은 계몽적참주라고 할 수 있는 페이시스트라토스(기원전 600~527) 때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시민과 농민들을 위한 정책을 수립했으며, 이런 정책의 한 일환으로 디오뉘소스 축제를 매년마다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축제에서 처음으로 비극이 상연되었다. 자연스럽게 시민 참여의 문제가 비극에서 주된 주제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이스퀼로스는 단박에 인간의 의지와 지혜만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신의 정의’를 완충하는 역할로서 들고 오는 것 같다. 특히 본인이 지켜낸 전쟁을 신들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싶은 의지가 들어있는 듯하다.


2015.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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