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과학적인 그래서 위험한 문자, 한글
0.
최고로 과학적이고 명료한 문자라는 한글, 그런데 바로 이런 이유때문에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불안을 더 크게 느끼는 건 아닐까. 살기좋은 나라라는 이미지와 21년 연속(2017년 제외) 자살율 1위라는 현실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머릿 속에서 이 생각을 떠올린 것이 2~3달이 넘는 것 같다. 어떻게든 쏟아내야 한다.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런 생각들을 다 풀어낼 때까지 마음이 편치 않다.
1.
우리나라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1인당 GDP가 3만달러를 넘은지는 좀 되었고, 2025년에는 해방후 처음으로 수출액과 1인당 GDP에서 일본을 제쳤다. 경제력만이 아니다. 2024년에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탔으며, 한국의 소설들과 시들이 점점 더 많이 번역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전세계인들이 우리의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며, 한국식 농담을 한다. 심지어 ‘씨x’은 ‘Fxxx’과 함께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욕이 되었다. 와우~
경제, 문화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가장 강한 국방력(세계5위)을 가진 나라 중 하나가 되었고, 전투기와 잠수함은 물론이고 탱크와 미사일방어체계까지 수출하는 기술력을 뽑내고 있다. 한강의 기적까지 내려 가지는 않겠지만, 객관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6.25전쟁 이후 반세기가 훌쩍 넘어가도록 지속적으로 발전한 나라는 거의 없다. 아니 한국이 유일하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2.
우리나라는 어떻게 이렇게 단기간에 경제적 발전을 넘어서 문화적 영향력까지 넓힐 수 있었을까? 한국인의 성실함? 한민족의 지적 우수성?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의 지원? 여러가지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 이유 중 하나는 ‘한글’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자랑하는 한글! 특히 아날로그 세상에서 디지털 세계로 변화하면서 한글의 위상은 더 높아졌다.
1980년대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1990년대에 거의 모든 업무를 컴퓨터로 처리할 때는 잘 몰랐다. 2000년대가 넘어서면서부터 모든 문자가 이렇게 디지털화하기 쉬운것이 아니라구라는걸 알았다. 특히 컴퓨터 자판에서 한글은 탁월하게 사용하기 편하다. 물론 같은 표음문자인 알파벳도 사용하기 좋지만 10개의 모음과 14개의 자음으로 구성된 한글은 최고의 효율성을 보여준다.
한글이 단순히 컴퓨터와 같은 디지털 기기에 사용하기 편하기 때문에 한국이 발전한 것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것은 한글이 가지고 있는 단순성, 명료성이다. 특히 한글은 소리나는 모양을 토대로 문자를 만들었다. 입모양과 혀의 위치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문자화하지 못하는 소리가 거의 없다. 표음문자는 기본적으로 그 소리와 뜻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무가 나무가 되는 것은 아주 자의적이라는 말이다. 어떤 소리도 문자화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에 현재 문자가 없고 언어만 가지고 있는 민족들들이 한글을 사용해서 자신들의 언어를 문자화하고 있다.
표음문자인 한글과 달리 표의문자와 상형문자를 기초로 하고 있는 중국이나 한자 없이 사용하기 힘든 일본은 문자를 디지털화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에서 한자를 줄이고 줄이더라도 최소 수천자의 한자를 사용해야하기 때문이다.
3.
한글이 명료하고 과학적이어서 디지털화하기 좋다는 것에는 모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료성과 단순성은 현대인의 불안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문자의 탄생은 인류사에서 최초로 개인이라는 ‘자기’와 ‘자기 인식’의 분리를 가져오는 일종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문자가 없었던 구술성의 시대에는 개인이 없었다. 구술성의 대표적 인물인 아킬레우스가 역사 속에 등장하는데 어떻게 개인이 없다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이때의 사람들이란 집단의식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지 공동체와 분리된 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자와 정신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강의나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던 것이어서 그 글의 일부를 그대로 가져오겠다.
문자와 정신공간
말이 ‘낱말’로 바뀌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 기록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처럼, 문자의 탄생과 함께 우리는 ‘집단의식’으로부터 분리되는 ‘자아’로서의 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떠돌아다니는 생각들, 사물들과 동물들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면서 발생하는 생각들과 자신의 생각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자아라는 것은 기억들의 집합, 표상의 집합으로서 정신이라는 개념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구름처럼 흘러다니는 생각들을 문자로 고정시킬 수 없을 때, 우리는 내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비교할 수 없다. 또한 어떤 특별한 생각이 자신만의 생각이라는 소유관념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의 집단의식이 강할수록 자신만의 생각을 갖기 어렵다. 문자의 탄생 이전에 떠오른 아이디어들은 나무의 신령, 땅의 정령이 준 것이고, 갑자기 생각나는 사악한 생각 역시 불화의 신이 던져준 것일 뿐이다.(신화적 정신공간) 문자의 발명으로 떠다니던 생각을 고정하게 되면서 다른 사람과 다른 자신의 생각을 의식하게 된다. 자기와 자기 인식, 의식과 무의식의 분리의 시작이다.
놀랍게도 의식을 가진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내면성은 인간만이 가진 독특성이자 어려움으로 이 되었다. 새로운 인간의 탄생! 문자를 배치하는 기술이 발달(문장, 문단, 장, 절, 색인 등등)함에 따라 우리의 내면성 역시 더욱 더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고 저장할 수 있으며, 또한 쉽게 지울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도달했다. 동시에 내면의 복잡성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직시하기 어려워졌다. 마음의 충동이나 내면의 모습은 문자와 다르게 일종의 모호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문자로 명료하게 표현했다는 것은 거기에 붙어 있던 잉여들을 배제할 때 가능하다.

위을 글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문자라는 기술은 곧바로 정신공간에 영향을 준다. 문자뿐만 아니라 컴퓨터, 인터넷, AI와 같은 기술의 발전은 지금도 우리 정신공간을 바꾸고 있다. 이렇게 문자의 탄생은 곧바로 집단과 떨어진 개인을 발명해내면서 자기와 자기 인식의 분리를 가져왔는데, 문자와 정신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한글은 아주 개별적인 개인을 생산하기에 최적의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즉 1980년대 이후 디지털 세계에 알맞은 도구인 한글과 디지털 세계에 적합한 정신공간을 가지고 있는 한국은 점점 더 세계적으로 뛰어난 역량을 보일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한글이 가진 장점은, 그대로 단점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가장 과학적인 언어를 가졌다는 것, 가장 명료하게 무언가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개인의 주체성 - 내면의 복잡성이 최고로 높아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본다면, 가장 과학적인 언어로 형성된 정신공간에서 의식과 무의식의 틈이 가장 넓게 벌어진다는 점이다.
4.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 1위가 된 것이 2003년이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2017년 단 한번을 제외하고 계속해서 자살율 1위를 지키고 있다. 좀 이상하고 놀랍지 않은가? 1997년에 우리나라가 IMF를 겪었기 때문이고 이유를 댈 수 있지만, 2007년의 리먼브라더스 금융위기는 세계적으로 겪은 아픔이다.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의 자살율은 변화 없이 계속해서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는가. 서두에 이야기했던 것처머 21세기로 넘어오면서 한국 문화가 전세계를 휩쓸고 있고,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고 안전한 나라라고 칭송하고 있는데 왜 자살율은 줄어들지 않을까? 작년(2025)에는 처음으로 40대에서도 자살율이 가장 높은 사망 원인으로 올라왔다.
현대인들에게 나타나는 가장 큰 특징은 불안과 소외(라고 생각한)다. 문자의 탄생 이후부터 점점 높아진 자기와 자기 인식의 분리(분열)은 내면의 복잡성을 높였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을 있는 그대로 표현(표출)하기 못하면서 불안과 소외는 느끼게 된다. 특히 표음문자 중에서도 가장 과학적이고 명료하게 표현이 가능한 한글은, 딱 그 말대로 너무나 과학적이고 명료하기 때문에 내면의 충동과 행동 사이에 간극이 더 크게 발생한다.
어떤 순간의 사람의 마음(충동)을 한 글자로 혹은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사실 함께 사는 가족에 대한 마음은 사랑하면서도 미워하고, 화를 내지만 미안하고, 장난치면서도 진지함을 동반한다. 한글이 가진 명료성은, 인간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내면 충동의 모호함과 잉여들을 없애버리기 때문이다. 마치 그런 모호함과 잉여들이 없는것처럼.
첫째, 한자 혼용에서 순한글로
1980년대쯤만해도 우리나라에서 한자 사용은 아주 흔했다. 신문을 볼 때 한자를 모르고서는 신문을 볼 수 없을 정도였고, 또 당시 세계전집이나 사회과학, 심지어 공학책들도 한자를 병용했다. 당연히 한자를 모르면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이뿐 아니라 신문이나 책들중 다수가 가로로 읽는 방식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읽는 세로 방식이었다.
이렇게 한자를 자연스럽게 사용하던 상황에서 순한글을 쓰게 된 변곡점은 내 생각으로는 한겨레 신문 덕분(?)이었다. 1988년에 처음으로 한자 없는 순한글 신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여진 한겨례신문이 탄생했다. 한자를 몰라도 신문을 읽을 수 있으니 편했고, 좀 더 평등한 읽기가 가능해졌다고 생각했다. 한자를 잘 모르는 어린이나 한자교육을 받지 않은 누구라도 이제는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로 이 순간부터 불안과 소외의 감정이 더 커졌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한글만을 쓰게 되면서 완전한 표음문자의 세계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표음문자란 문자와 뜻 사이에 아무런 연결점이 없기 때문이다. ‘나무’가 저 산에 읽는 ‘나무’가 되는 것은 ‘ㄴ+ㅏ’,’ㅁ+ㅜ’를 연결시켜서 아주 ‘자의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동의한다면 내일부터 ‘나무’를 ‘무나’로 해도 된다. 명료성을 커졌을지 모르지만, 뜻과 의미 사이의 연결점은 끊어져버렸다. (물론 한글도 처음 생긴 상황, 기원을 가지고 있을것이다.)
말이라는 것과 言(말씀 언)은 똑같지 않다. 한자가 더 위대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표의문자는 그 말이 형성된 그 상황 그리고 단순히 그것은 ‘말’로는 번역할 수 없는 어떤 면모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표음문자로 말이라고 하면 우리는 딱 그 말이라는 내용만을 뜻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둘째, 성조(tone)가 없는 언어
중국이나 태국, 베트남과 달리 우리나라 언어에는 성조가 없다. 아니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성조도 사라지고 있다. (처음 한글 창제했을 때는 성조가 있었다고 한다.) 성조가 없기 때문에 그 말은 곧바로 그 뜻이 된다.
반면 중국에서는 표기가 똑같아도 높은 성조, 낮은 성조 혹은 높은 것에서 낮아지는 성조, 낮은 것에서 높아지는 성조가 다 다른 뜻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할 때 좀 더 신체적인(소리)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중국만이 아니다. 중국이 4성조라고 하면, 태국은 5성조, 베트남은 6성조를 쓰고 있다. 반대로 우리나라의 말은 성조가 없어서 성조를 신경쓰지 않고 그 말대로만 읽으면 뜻을 전하는데 문제가 없다. 소리의 고저와 흐름을 제외하기 때문에 아주 건조하게 내용만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 전달이 쉽고 명료하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 나라 언어에서 신체성이 점점 더 배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아직까지도 성조가 남아있는 지역이 있다. 경상도를 보면 2^2승, e^2승을 다르게 발음한다. 안타깝지만 이런 성조의 흔적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셋째, 억양(intonation)이 사라지고, 점점 더 단조로워지는 표준어
더 큰 변화는 억양의 단조로움이다. 최근 SNL을 보면 1980년대의 말투가 우습다는 듯이 따라하기도 하고, 이제는 1990년대의 말투를 흉내내면서 패러디를 한다. 나 역시 1980년대와 90년대를 살았지만 당시에 내가 이런 말투를 했나 의아하게 보게 된다. 하지만 더 놀라운 점은 표준어의 억약이 점점 단조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언의 특성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표준어 자체가 가지고 있던 억양이 점점 단조로운 기계처럼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세기 급진적 사상가였던 이반 일리치는 미국식 영어를 보면서, 그들의 말이 점점 기계어처럼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간단한 언어, 명료한 언어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현재의 서울말, 20~30대의 말투를 보면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높낮이 변화가 거의 없다. 마치 기계가 말하는 것처럼 단조로운 방식으로 말한다. 억양 측면에서도 언어의 신체성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 장음과 단음
더 심한 것은 이제 아나운서조차도 우리나라 단어의 장음과 단음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하늘에서 내리는 눈[雪]은 얼굴에 있는 눈[目]과 말할 때 길이가 다른다. 하얀 눈은 장음이고, 얼굴에 있는 눈은 단음이다. 이외에도 꽤 많다. 먹는 밤[栗]은 장음이고, 어두운 밤[夜]은 단음이다. (말(馬)과 말(言),곤충 벌(蜂)과 잘못해서 받는 벌(罰),먹는 굴과 땅속 굴: 전자는 단음, 후자는 장음)
생각해보면 장음과 단음을 디지털 세계에서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먹는 밤과 어두운 밤을 어떻게 표현할까. 물론 밤과 바~암, 뭐 이런 식의 표기가 가능하겠지만 편리성과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세계에서 이런 차이는 점점 무시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글은 점점 더 디지털 세계에 맞는 형식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전에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신체성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5.
우리나라에서 불안을 느끼는 모든 이유가 한글-문자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글에서 일어난 이러한 차이들을 보니 정신적인 긴장감과 문자사용에 있어서 긴밀한 상관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문자와 정신공간’ 도표를 보면 사실 개인의 주체성이 높아질수록 속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극과 불안감이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간극, 속마음과 행동의 간극을 드러내고 또 메우려는 다양한 노력들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작동해온 중요한 방식은 예술이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근대 이전에 예술은 삶과 떨어져 있지 않았다. 마법적 세계, 신화적 세계를 무시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독수리가 떠오를 때는 제우스 신을 떠올렸고, 짐승을 죽여 먹어야 할 때는 항상 자연에게 일부를 바치면서 상호적인 연결을 상기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굿이 그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글문자에서 일어난 4가지 변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했던 속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고 메우려는 공동체적, 개인적 의례(ritual)이 사라진 것이 더 큰 문제였을지 모른다. 미신적이고, 원시적이라고 하면서 배제했던 굿이나 신화적인 의례들은 사실 그 의례를 통해서 간극은 인정하고 자신의 내면적 충동을 해소하는 방편이었을 것이다. 근대에 다양한 미술, 문학, 춤과 같은 예술 형식이 발명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학과 이성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마법이나 신화가 아니라 순수예술이라는 가면을 써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처음 보는 그림 앞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또 우연히 마주친 음악에 환희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현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활동은 바로 예술, 자신의 내면적 충동을 마주치고, 또 해소하는 것이다.
예술활동이 어색하다면 위에서 언급했던 문자에 모호성과 잉여성을 회복시키면 된다. 아직 기회는 있다. 한글이 가지고 있는 명료성을 지키면서, 그 안에서 다시 잉여적인 부분들을 살릴수 있다.
하나, 낭독
언제부터인지 텍스트 읽기란 무조건 묵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묵독이 이렇게 보편화된 것은 불과 몇백년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다른 민족들이나 지역에서는 낭독이 중요한 읽기의 기술로서 작동하고 있다.
어떤 책이든 좋다. 낭독을 하다보면 묵독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느낀다. 한 문장을 읽더라도 자신의 상태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고, 또 달라진 소리를 들으면서 표면적인 뜻과는 다른 의미가 솟아오르기도 한다.
낭독이 좋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낭독은 집단적이라는 사실이다. 혼자 낭독하는 것도 좋지만 일정 그룹을 형성해서 다함께 혹은 돌아가면서 낭독을 하면 잃어버렸던 공동체적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마치 2시간 동안 함께 콘서트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 일정한 리듬과 활동을 함께 하면 자신도 모르게 개인적 의식이 깨지고 집단의식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낭독 역시 마찬가지다. 꾸준히 함께 1시간 정도 낭독하다보면 자신만의 리듬이 형성되고, 또 자신의 리듬 -호흡, 걸음, 말투 -이 새롭게 드러난다. 또 동일한 시간에 함께 낭독을 하면서 따로 또 같이의 공동체적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어쩌면 낭독은 현대인이 갖는 불안을 떨쳐버리는 가장 쉬운 기술인 것 같다. 지금 바로 시작하면 된다.
둘, 한자 읽기 혹은 새로운 언어 배우기
한글과 함께 영어나 프랑스어, 혹은 독일어나 중국어를 말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신기하게도 한국어로 대화할 때의 본인과 영어로 대화할 때의 자기는 다르다. 말투가 달라지고, 억양도 다르다. 개인적 경험으로 영어로 말을 하게 되면 톤이 높아지고, 행동과 생각이 좀 더 가벼워진다.
문자와 정신공간은 확실이 상호적으로 영향을 준다. 그래서 뭔가 변화를 만들고 싶다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새로운 언어는 현재 자신의 정신공간에 변이를 만들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재 한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한자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는 한자 읽기의 운동이 필요하다. 한자는 단순히 외국문자가 아니라 한글을 좀 더 풍요롭게 만들고, 표음문자인 한글의 구멍들을 메우는데도 필수적이다. 한자를 병용해서 쓰고 읽는다면 단순 문해력의 향상이 아니라 사유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6.
가장 과학적인 문자인 한글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를 앞서가는 토대로서 한글을 제대로 사용하고, 동시에 자기 내면을 바라볼 수 있는 활동을 함께 해야한다는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제 예술은 단순한 취미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근본적 불안, 소외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삶을 유지시키는 생존욕구다. 예술활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필수적인 욕구로서 인정받아야 한다. 또한 명료한 문자를 사용하면서 느끼는 소외감과 배제를 인정하면서, 모호성과 잉여성을 보완하는 언어사용을 되살릴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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