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를 보면서 떠올리는 색깔이다. 그런데 정말 내가 보는 색이 빨주노초파남보인가? 무지개는 당연히 빨주노초파남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무지개의 색깔은 그렇게 확실한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빨주노초파남보라고 하는 것은 실제 우리가 본 것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언어가 만들어낸 현실-환상이기때문이다.
언어와 색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그곳은 소, 와인, 바다가 모두 빨갛다> 기 도이치) 문화와 지역에 따라서 색을 지칭하는 것이 다르다. 특히 원시 부족들은 색에 대한 분류가 세밀하지 않기에 빨강 노랑 검정 정도만의 언어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 푸른 하늘은 검은 하늘빛이라는 언어를 갖게 된다. (기 도이치가 이 색깔 문제에 천착하게 된 것은 호메로스의 시에서 본 '검은 하늘'이라는 표현에 있다.)
빨주노초파남보라는 7가지 색과 연결해서 보면 '도레미파솔라시'라는 음계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에게 음은 당연히 도레미파솔라시라는 음계를 가져야 한다. 놀라운 것은 이런 언어를 갖게 되면서 우리는 도레미파솔라시만 듣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귀가 도보다 3/4높은 음을 듣지 못할까. 아니다 우리의 귀는 분명 20~20000Hz를 다 듣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색은 물론이고, 너무나 신체적으로 생각하는 음 역시도 경험한 것을 듣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으로 정의된 것을 듣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현대음악이라는 것은 7개로 나눠졌다는 음계의 환상을 깨고, 미분화된 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에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도레미파솔라시까지 생각하니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시간간격도 떠오른다. 놀랍게 모두 7단계로 나눠져 있다. (7은 성서적 배경에서 나온것일까? 아니면 더 깊은 문화적 배경이 있는걸까?) 우리는 현재 일주일의 리듬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다. 5~6일정도 일하면 적어도 하루 이틀은 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이게 직접적인 신체의 경험과 감각으로 만들어진걸까? 누군가는 5일정도의 리듬이 또 다른 누군가는 10일의 리듬으로 살아가기를 원할 수 있지 않을까.
색깔, 음계, 시간감각까지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마치 당연하고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무지개를 똑같이 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무지개의 색깔이 빨강-노랑-검정색이라고 한다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지개의 색깔이 너무나도 확실하게 빨주노초파남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확실성의 유혹은 바로 여기에서 온다. 자신이 본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너무나도 큰 확신은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본 것을 믿어주지 않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무엇보다도 큰 분노를 일으킨다. 문자와 정신공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개인이라는 주체성은 사실 시각적 확신에서 오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선언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확실성의 주체 역시 사실은 '시각적 확실성'에서 기인했다. 집단과 다른 나라는 자기 인식을 갖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다른 나만의 생각이라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인식이 가능했던 것은 '문자의 탄생'부터 가능했다.
(*보충 :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정신을 갖고 있었고, 무언가를 생각했고, 또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문자가 없었기때문에 이러한 생각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문자로 적어놓지 않는다면 바로 30분 전에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확신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24시간 전 혹은 한 달전에 내가 생각한 것을 확신할 수 있을까. 문자 이전의 인간들은, 사실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도 오랬동안 사람들은 나에게 온 특별한 생각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았다. 이 생각을 하늘과 세계를 흘러다니다나 나에게 잠시 머무른 것일 뿐이다. 나무의 정령이 준 것이고, 바다의 신이 나에게 준 것 혹은 제우스나 아테네 여신이 준 생각일 뿐이다. 즉 문자의 발명 이전에는 집단과 다른 나만의 생각을 갖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문자가 발명은 현대의 개인이라는 주체가 탄생하는 토대라고 할 수 있고, 이 문자는 다른 감각이 아닌 눈을 통해서 읽는 기술이었다. 물론 문자의 발명 이후에 읽기가 완전히 눈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12세기에 혼자서 읽을 수 있는 읽기 기술(띄어쓰기, 마침표, 쉼표 등등)이 발명되기 전까지 (이후에도) 읽기는 기본적으로 소리내서 읽기였다. )
잘 생각해보면 유독 우리는 여러 감각들 중에서도 자신이 직접 본 것을 부인당하는 것을 힘들어한다. 자신이 본 것을 무시하는 것은 곧바로 자기에 대한 무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지개의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했듯이, 자신이 봤다는 것은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특히 내가 봤다는 것을 타자에게 이야기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언어를 통해서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자신이 경험한 것을 그대로 전할 수 없다. 만약 문화적 배경이 다르다면 언어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언어로 표현할 때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다툼과 불화는 바로 여기에 있다. 확실성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냄새맡았을지라 100% 확신해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말은 자신의 감각을 불신하라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이렇게 감각한 것을 신뢰하면서도, 다른 사람은 다르게 보고, 들을 수 있다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시각적 확신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자신이 직접 본 것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하다. 눈으로 봤다는 것은 실재적 대상이 거기에 있다는 확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라캉이 말했듯이 이 현실은 개개인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환상-현실이다. 언어(상징계)를 벗어난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 정신분석을 이용해서 말하면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실재(the real)은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어떤 언어로도 그 실재를 표현할 수 없다. 언어로 표현하는 그 순간 실재를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무언가를 봤는데, 자신이 본것과 다르다면 잠시 멈춰서야 한다. 네가 틀렸다라고 말하기 전에 그 사람이 그렇게 본 것이 무엇을 드러내는가 생각해야 한다. 반대로 내가 확실하게 보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을 드러내는가도 생각해야 한다.
일상 생활에서 직접 실험해보라.
놀랍게도 우리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한 너무나 확실한 확신을 갖고 산다. (이러한 확신을 갖지 않는다면 사실 자아를 가진 주체로서 살아가기 어렵다. 반대로 여기에서도 자아 역시 거울에 비친 상상계적 환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스터리 영화나 스릴러를 보면 정상인을 미친 사람으로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언가를 진짜 보게 만들고' 다른 모두가 이를 부인할 때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것은 진짜 보았기때문이다.
빨주노초파남보, 도레미파솔라시, 월화수목금토일에 꽂혀서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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