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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조건으로서거짓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다

by 홍차영차 2025. 11. 6.

 

별다른 아무일도 없었다.

멀쩡히 세미나도 잘 했고 새벽낭독도 잘 마쳤다. 수요일 새벽 니체의 <비극의 탄생> 낭독도 잘 마무리했다. 오랜만에 수원에 가서 아부지와 점심을 먹었다. 사소한 말다툼도 없이 집으로 왔다. 그런데 바로 이런 때, 뭔가 잘 마무리되었다고 생각되는 그런 순간에 이런 기분이 날 사로잡을 때가 있다. 마치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마치 이 구멍을 막으려는 것처럼 나도 모르게 뭔가를 찾고 있다. 먹을 것을 찾아서 배를 채우면 해결이 될까. 달콤한 빵을 먹고, 비빔면을 먹고, 사과와 귤까지 찾어서 먹는다. 몸을 움직이면 괜찮을까. 힘껏 달리기를 하고 샤워를 한다. 이제 좀 괜찮은 것 같지만 이 구멍은 의식되는 순간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그래도 숨이 턱까지 차도록 몸을 움직이다보면 사라지곤 하는데 어제는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면 해결될까. 하지만 알고 있다.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럴 때 찾는게 시(음악), 문학이다. 문학이 하나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시집을 뒤적거리다가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미나리꽝샘이 소개해준 책이다. 신기하게도 <침묵의 세계>를 소개해주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글을 읽으면서부터 블랙홀같던 구멍의 흐름이 잔잔해진다. 더 이상한 것은 이 책은 어떤 내용, 의미있는 내용을 전하는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침묵을, 말이 아니라 침묵을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침묵, 소리가 없는 수동적 상태가 아니라 말을 배태하는 시원적인 것으로서의 침묵! 모든 것을 생산할 수 있는 능동적이고 완전하고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로서의 침묵! (말이 되나?) 그 앞에 서면 두렵고 불안하기도 한데 놀랍게도 '침묵'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 안의 구멍이 메워지는 것 같다. "우리는 현대의 철학자가 보다 더 시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다"는 막스 피카르트에 말에 나도 모르게 동의를 표한다. "사상과 시"의 재일치란 곧 무의식과 의식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원적인 침묵이 두렵고 무섭지만 바로 그 침묵을 대면할 때에야 세계(나)와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나는 처음에는 그가 이야기하는 침묵이 그 무엇의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능동적인 그 무엇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었다. ..... 우리는 위대한 훔볼트가 언어는 단순한 기호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가장 명확하게 이미 단언한 바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더구나 하이데거가 극명하게 지적한 것처럼 우리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단순한 지껄임으로 - 그의 표현을 따르면 "수다(gerede)"로 - 타락하고 있는 듯하다. 9

우리는 현대의 철학자 - 단순한 아카데믹한 강단 철학자의 경우가 아닌 한 - 가 보다 더 시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또한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주변의 어디에서나 잃어버린 아틀란티스가 심연에서 다시 솟아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찾은 이 대륙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였던 사상과 시의 재일치가 처음부터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피카르트의 글이 제 위치를 찾는 것은 바로 이 대륙에서이다. ...... 그러나 피카르트의 자세에는 허무주의적 염세주의의 기미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하겠다. 12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中 가브리엘 마르셀의 소개글)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다. ...... 침묵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인간은 침묵에 의해서 관찰당한다. ...... 오직 말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지만, 오직 침묵만이 존재하는 세계는 아마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침묵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침묵은 아마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완전하게 현존하며 자신이 나타나는 공간을 언제나 완전하게 가득 채운다. 20

침묵은 하나의 원초적 현상이다. 말하자면 아무것에도 소급시킬 수 없는 원초적 주어져 있음[所與]이다. ...... 그것은 하나의 죽음과도 같다. 우리는 홀로 버려진 채 새로운 시작과 마주해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불안해한다. "원초적 현상들이 우리의 감각에 그 모습을 드러낼 때 그 원초적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일종의 두려움을 그리고 불안감까지도 느끼게 된다."(괴테) 따라서 침묵 속에서 인간은 다시금 시원적인 것 앞에 서게 된다. 모든 것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다시 새로이 창조될 수 있다. 어느 순간이나 인간은 침묵을 통해서 시원적인 것의 곁에 있을 수 있다. 침묵과 결합하면 인간은 침묵의 원초성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원초성에 참여하게 된다. 침묵은 항상 인간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유일한 현상이다. 24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침묵의 세계>가 좀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라캉 덕분인것 같다. 특히 이번에 라캉이 말하는 '간극, 균열, 결여, 공백으로서의 무의식'이 무엇인지 좀 더 체감해서인 듯 하다. 도식적으로 느껴지지만, 침묵과 말에 대한 피카르트의 말은 마치 라캉이 이야기하는 무의식적 주체과 자아를 연상케 한다.

문자가 생기면서 상상적 자아가 탄생했지만 무의식이 없었다면 상상적 자아는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문자로 인해서, 언어로 인해서 세계가 피폐해졌다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이 언어가 "침묵으로부터, 그리고 침묵의 충만함으로부터"(26) 나왔다는 사실이다.

 

침묵은 말이 없이도 존재할 수 있지만, 말은 침묵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말에게 침묵이라는 배경이 없다면, 말은 아무런 깊이도 가지지 못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침묵이 언어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침묵, 즉 말 없는 침묵의 세계란 다만 창조 이전의 것일 뿐이다. 그서은 완성되지 않은 창조일 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창조이다. 31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음악의 소리는 말의 소리처럼 침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평행한다. ...... 음악은 꿈꾸면서 소리내기 시작하는 침묵이다. 음악의 마지막 소리가 사라졌을 때보다 침묵이 더 잘 들릴 때는 없을 것이다.

음악은 멀리까지 미치며, 단번에 전 공간을 점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은 느릿느릿 수줍게 리듬을 통해서 공간을 차지하고, 언제나 다시 같은 멜로디로 되돌아온다. 그리하여 음악의 소리는 마치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고, 도처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정된 한 장소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것, 즉 공간적인 멂과 가까움, 무한과 유한이 음악을 통해서 부드럽게 병존하고 있다는 것이 영혼에게는 하나의 은총이자 위안이다. 음악 속에서 영혼은 멀리까지 떠돌 수 있고 그러면서도 그 어디에서나 보호받고, 그리하여 안전하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 음악은 영혼이 불안감 없이 있을 수 있는 어떤 넓이를 영혼에게 가져다준다. 30 (막스 피카르트 <침묵의 세계>)

 

아, 여기서 음악까지 말하면 안될 것 같지만 위의 구절들은 음악이 어떤 것인가를 정말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음악은 말(의소리)처럼 침묵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과 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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