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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조건으로서거짓

새벽낭독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by 홍차영차 2025. 7. 3.

 

레피샘의 낭독 후기를 읽으면서 머릿속에만 있던 '낭독에 대한 생각' 써야지라고 다시 생각!

얼마전에 썼던 <나는 오늘도 새벽낭독을 하기 위해 일어났는가> 이어서 '새벽낭독이 삶에 미치는 영향' 관해서 조금 구체적으로 써보려고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이야기는 레피샘이 낭독후기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라고도 있을 하다. ^^;

 

 

낭독은 하나의 삶의 형식이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하나의 삶을 조성하는 일이다. 낭독하는 삶이란 책을 들고 그저 읽어나가는 한가한 삶이 아니다. 새벽 낭독은 삶을, 일상을 새롭게 조직하는 일이다. 그것을 위해 저녁을, 밤을, 새벽을- 의식과 무의식, 낮과 밤, 어둠과 밝음, 빛과 그림자과 뒤섞인 이 애매하고 모호한 시간 - 우리의 어둠을 혼란스럽게 하는 저 빛의 세계를 조절하고 통제하며 억제하는 일이다. "훌륭한 취미를 위해 사람들은 큰 희생을 치렀음이 틀림없으며, 그것을 위해 많은 것을 행하고 많은 것을 포기했음이 틀림없다."(159쪽)
"민족과 인류의 운명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것은 도야(cultur)를 올바른 장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영혼에서 시작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장소는 신체, 품행, 섭생법, 생리학이며, 나머지는 그것으로부터 저절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160쪽) 
낭독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조성할 있는 올바른 장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 거창한가?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와 함께 새벽에 일어나 낭독을 시작해 보라. (함께 낭독하는 레피님의 낭독 후기 中 ) 

 

 

나는 오늘도 새벽낭독을 하기 위해 일어났는가라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세 나는 낭독을 일종의 리추얼(ritual,의례)이라고 말했다. 낭독이 어떻게 리추얼(의례) 있을까? 의례란 무엇인가? 사전적으로 보면 의례란 '정해진 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 우리에게 익숙한 리추얼을 떠올려보면 결혼식, 장례식, 제사 혹은 설날에 다함께 떡국을 먹는다거나 추석에 송편을 빚어 먹는 같은 것들이다. 의례의 예들을 생각해보면 뭔가 지겹고 귀찮고 하기 싫은 것들처럼 보인다. 해야될 것이라기보다는 허례허식이 떠오른다고 해야할까. 제사는 거의 사라졌고, 결혼식은 간소화되거나 개성적이고 자유로운 형식으로 변했고, 또한 아이들이 장례식에 같이 참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의례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졌을까? 뭔가 귀찮고, 지겹고 허례허식처럼 보인 것들은 사실 우리의 "삶을 조성하는 "이었다. 결혼식과 장례식,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타자와 연결된 나를 발견하고, 일종의 정해진 몸짓이나 의상, 말을 통해서 서로간의 관계성을 계속해서 확인했다. 설날에 떡국을 먹어야할까? 귀찮게 송편이나 만두를 직접 빚을 필요가 있을까? 리추얼의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과정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강하게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자의식이 점점 커지고, 가족 속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이러한 리추얼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지금 다시 명절마다 만두를 직접 빚자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위기는 여기에서 찾아온다. 이제 마음껏 나를 표현하고, 나만의 삶을 구성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러한 의례를 벗어나서 자신만의 새로운 의례를 발명하기가 쉽지 않다. 제사를 하지 않게 되었으니 편해졌다라는 것으로는 삶의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의례, 나만의 리추얼, 우리들만의 리추얼을 발명해내야한다. 자칫 잘못하면 삶이 형태도 갖지 못하고 무너질 있다.

 

리추얼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사전뜻 그대로 의례라는 것에서 중요한 것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서 치르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 장례, 제사라는 의례를 통과하면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은 물론이고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어떤 윤리를 가져야하는 것까지 신체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리추얼이라고 하면 반복이 중요하고, 신체에 새겨지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대로 반복적인 의례를 통해서 개인이라는 신체가 만들어지고, 삶과 일상이 조직된다.

 

2024년부터 나의 삶에 가장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다름아닌 새벽낭독이다. 낭독의 내용인 니체의 텍스트를 말하는 아니다. 매주 // 새벽 6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고, 소리내서 뭔가를 읽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형식-행위다. 나에게 새벽낭독은 '정해진 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 - 리추얼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나에게는 읽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내용이 아니라 형식!

매주 //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고양이 밥과 물을 주고, 양치질과 세수를 하고, 양배추즙을 마시고 결명자차를 준비하는 형식-행위가 중요하다. 이러한 절차를 통해서 루틴이 시작된다고 할까.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1시간동안 소리내서 텍스트를 읽고, 다른 사람이 읽는 소리에 집중하는 ! 낭독을 하다보면 내용이 들어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읽어주는 소리에 집중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소리를 내고 소리를 듣는 자체가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를 깨우고 생성하는 중요한 리추얼로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새벽낭독이 삶에 미치는 영향을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대로 매주 // 새벽에 일어나서 활기차가 낭독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를 옹골차게 보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 활동도 하지 않고 하루를 지내면 밤에 숙면을 취하기가 어렵다. 새벽낭독 이후에 하루를 보내야만, 특히 신체를 쓰는 활동이 적절하게 이루어질 밤에 잠을 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새벽 6시에 일어나는 것이 어렵지 않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신체는 아주 영악하다는 사실이다. //수에만 새벽낭독을 하다보면 신체는 벌써 일주일의 리듬을 알고 있다. 목요일이 되는 순간 곧바로 늦게 일어나게 된다. (아니 늦게 일어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만약 //수를 제외한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엉망진창의 리듬으로 지낸다면 당연하겠지만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

 

"새벽낭독은 삶을, 일상을 새롭게 조직하는 "이라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다. 그리고 낭독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책을 들고 그저 읽어가는 한가한 " 아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새벽낭독을 한다는 것은 그대로 우리의 신체에 삶을 새롭게 조성하는 일이다. <우상의 황혼> 나왔던 말을 다시 한번 읽어보자. "민족과 인류의 운명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것은 도야(cultur) 올바른 장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영혼에서 시작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장소는 신체, 품행, 섭생법, 생리학이며, 나머지는 그것으로부터 저절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니체 <우상의 황혼> 아카넷, 160)

 

새벽낭독은 일종의 리추얼로서 작동할 있다. 그런데 새벽낭독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주 사소하게 여기는 활동들, 아니 활동이라고도 여기지 않는 무시받는 것들이 나의 삶을 새롭게 조성하는 리추얼이 있다. 매주 토요일마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마다 현대미술관의 전시를 보는 , 일주일에 2번씩 조깅을 하는 , 한여름 휴가때 좋아하는 소설책을 읽는 .

의미와 내용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 이게 무슨 가치(?) 있어라고 따지지 말고 그렇게 행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면 그것이 바로 '나만의 리추얼' 있다.

 

여기에서는 낭독을 개인적인 리추얼로서 이야기했지만, 공동체적인 측면에서도 작동할 있다. 매주 //수요일에 함께 낭독하면서 쌓아지는 관계성, 매주 한번씩 모여서 공동의 텍스트를 읽고 세미나를 하면서 형성되는 공동체성! 이외에도 함께 춤을 추고, 산책을 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새로운 리추얼이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혹은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리추얼을 실험하고 발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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