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해석> 다섯번째 장에서는 프로이트가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추측할 수 있는 여러 장면들이 나와있다. (어디인지는 다시 확인해봐야겠지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강의>를 읽으면서 기억에 남는 구절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잠자면서 생산하는 예술이 꿈"이라는 말! 프로이트의 이 말을 듣자마다 정신분석과 예술을 관통하는 무의식의 역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말을 확장해보면 "잠자면서 생산하는 예술이 꿈이라면, 낮에 꾸는 꿈은 예술"이라는 말이 된다. 다시 말해서 꿈의 메커니즘과 예술의 메커니즘이 동일하다라는 말이다. 꿈과 예술에 있어서 핵심은 무의식이다.
누구나 꿈을 꾼다.
당연한 말이지만 꿈을 꿀 때 우리는 잠을 잔다. 즉 우리의 의식은 꿈 속에서 힘(영향력)을 잃는다. 꿈 속에서 의식의 영향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꿈 속에서는 현실의 나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가당치 않은 꿈을 꾼다. 하늘을 날아오른다든가, 강아지와 대화를 한다든가 혹은 절대 만날 수 없는 죽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정말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죽는 꿈을 꾸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이것이 바로 무의식의 메커니즘이다. 즉 꿈은 무의식의 작동원리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뜻이다. 물론 아직 정확한 꿈-작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는 나오지 않았다. (전이와 압축이라는 꿈-작업은 다음 여섯번째 장에 나온다.) 사실 꿈-작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도 신기하지만 프로이트의 말대로라면 시인의 작업 역시 '무의식'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 더 놀랍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 불가능한 비밀 혹은 영감이라는 아우라를 갖고 있는 예술가 혹은 예술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려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꿈은 누구나 꾸지만, 누구나 시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꿈속에서 무의식은 자연스럽게 힘을 갖지만, 시를 쓰는 나는 의식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낮에 꾸는 꿈이 예술'이라고 말했지만 의식을 놓지 않으면서 어떻게 무의식이 주도권을 잡게 할 수 있을까. 어릴 때는 누구나 예술가라는 말이 떠오른다.
<...... 이것은 유사 이래 객지를 방랑하는 슬픈 인간의 꿈입니다. 호메로스는 인류의 가장 심오하고 영원한 본성을 토대로 이런 상황을 끌어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시인은 독자에게서 인류의 가장 심오하고 영원한 본성을 일깨울 수 있다고 믿는다. 훗날 역사 이전의 일이 되어 버리는 유년 시절에 뿌리를 둔 정신생활의 움직임이 바로 그런 본성이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의 의식에 떠오르는 명백한 소원 너머로 허락받지 못하고 억압된 어린 시절의 소원이 꿈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그 때문에 나우시카 전설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꿈이 불안-꿈으로 변하는 것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2020년 신판 313쪽)
프로이트는 먼저 신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로이트에게 오래된 신화란 결국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하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형성물이다. 즉 시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인류가 가지고 있는 (억압된) 본성'을 그려내고 일깨우는 사람이다. 문자가 없던 시절이 이런 인간들의 꿈은 '신화'라는 말로 전승되었고, 현재는 문학이나 다양한 예술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법은 아니자만 신화는 그만큼의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신화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작업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특성,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지름길이 된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내 경험에 따르면, 어른이 되어 정신 신경증을 앓게 되는 어린이들의 정신생활에서 부모가 중대한 역할을 한다. 그 시기에 형성된 부모의 어느 한쪽에 대한 사랑과 다른 한쪽에 대한 증오심은 훗날 신경증 증상에 아주 중요한 부동의 심리적 자극 재료이다. 그러나 나는 정신 신경증 환자들이 절대적으로 새로운 것, 그들만의 특유한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어, 정상적인 다른 인간들과 극명하게 구분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이러한 인식을 뒷받침해 주는 재료로써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의 강력하고 보편타당한 영향력은 지금 논의한 아동 심리의 전제 조건이 유사하게 보편타당성을 가질 때에만 이해도리 수 있다. 그것이 오이디푸스 왕 전설과 소포클레스가 지은 동명의 희곡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2020년 신판 329~330쪽)
프로이트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신화 중 하나가 바로 오이디푸스 신화다.
"부모의 어느 한쪽에 대한 사랑과 다른 한쪽에 대한 증오심" 사실 그리스의 오이디푸스 신화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비슷한 테마의 신화가 등장한다.(고 한다.) 아직은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이러한 신화 분석을 통해서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이론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발명해낸다. 물론 프로이트 스스로가 진행한 분석, 그리고 이전의 많은 분석 사례를 바탕으로 진행되었겠지만 오이디푸스 신화가 프로이트의 주장에 가장 큰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다른 위대한 비극,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오이디푸스 왕>과 같은 토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 ...... 햄릿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다만 자신의 아버지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대신 어머니를 차지한 남자에게 복수하는 일만은 하지 못한다. 이 남자는 어린 시절 억압된 자신의 소원을 성취시킨 사람이다. 햄릿에게 복수할 것을 촉구하는 혐오심은 자기 비난, 즉 문자 그대로 징벌해야 하는 죄인보다 자신이 더 나을 것이 전혀 없다고 꾸짖는 양심의 가백과 뒤바뀐다. 이것은 내가 주인공의 정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식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햄릿을 히스테리 환자라고 부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내 해석의 추론 결과로서만 그것을 인정할 수 있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2020년 신판 334~335쪽)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햄릿으로 연장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으로. 그리스 신화가 문자가 없던 구술적(신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던 모습이라면, 1600년의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문자를 가진 이후, 특히 '회의하는 나'라는 새로운 인간형이 드러나는 시점을 잘 보여준다. 셰익스피어에서 이제는 집단보다 개인에 집중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게 되는 인간의 고민을 볼 수 있다. 속마음을 갖게 된, 이제는 자유자재로 속마음과 다른 거짓을 하게 된 인간들이 갖게 된 딜레마를 볼 수 있다. 사실 햄릿의 고뇌하는 모습은 40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그리 낯설지 않다.
이러한 사태는 일련의 불안-꿈을 가능하게 한다. 그 반면 소원 이론에 부적절한 다른 부류의 꿈-형성물에서는 다른 메커니즘을 인식할 수 있다. 요컨대 꿈에서의 불안은 신경 정신적인 것으로, 성 심리의psychosexuell 흥분에서 비롯될 수 있다. 이때 불안은 억압된 리비도와 일치한다. 그런 경우 불안과 불안-꿈 전체는 신경증 증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꿈의 소원 성취 경향이 한계에 이르는 지점이다. (프로이트 <꿈의 해석> 2020년 신판 300~301쪽)
오이디푸스와 햄릿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바로 시인들의 작품에 무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시나 소설과 같은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곧바로 정신분석과 연결되고, 현실에 실존하는 인간을 상담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문학작품 분석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 보면 꿈에서 다양한 꿈-재료와 꿈-자극을 통해서 꿈을 만들어내는 꿈-작업은 시인이 시를 쓰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프로이트는 꿈의 소원 성취가 한계에 이르는 지점에서 불안-꿈, 즉 신경증과 같은 정신병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꿈에서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지속적인 예술작업을 통해서 이 한계를 극복한다면 불안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깨어 있는 상태에서 어떻게 '무의식'이 작동하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의식의 비판적 경향 역시 훈련을 통해서 바뀔 수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서 자유연상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의식의 검문작업이 있어서 자유연상이 어렵지만, 몇번의 훈련을 한다면 누구라도 '자유연상'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자유연상이 가능하게 하는 방식으로 누구나 '낮에 무의식의 도움을 받아서' 예술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각자의 무의식에서 불안을 해소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관련해서 이전에 썼던 꿈과 예술의 평행론을 함께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정신분석강의>를 읽었던 때 썼던 글인데, <꿈의 해석>을 마무리하고서 다시 한번 정리해보고 싶다.
꿈과 예술의 평행론 1
https://cafe.naver.com/afterworklab/1434
꿈과 예술의 평행론 2
https://cafe.naver.com/afterworklab/1435

'삶의조건으로서거짓'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물리칠 수 없는 확실성의 유혹 (1) | 2025.12.25 |
|---|---|
| 몸 어딘가에 구멍이 뚫렸다 (1) | 2025.11.06 |
| 낱말에도 무게가 있다면 좋겠다 (3) | 2025.07.10 |
| 새벽낭독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하여 (4) | 2025.07.03 |
| 영화(movie)는 끝났다 - 영화를 볼 수 없는 신체 (7) | 2024.10.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