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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나는 전대미문의 무서운 인간이다

by 홍차영차 2025. 12. 25.

 

<이 사람을 보라>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이다. 이 책이 니체 이후에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사용설명서라면 여기서 '운명'은 두 가지를 함축하고 있다. 니체가 이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운명'이다. 기독교적 진리가 무너진 1844년에 태어난 니체는 자기 내부에 "이성적 인간과 직관적 인간"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니체에게 남은 길은 오직 이길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도덕을 힘, 원인, 목적 자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번역한 것"은 하나의 운명이고 바로 그것이 차라투스트라가 해야할 일이었다.

 

두번째, '하나의 운명'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운명을 마주하는 것은 그 누구라도 피하고 싶어할 만큼 잔혹하고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선한 진리라고 믿었던 것, 자기 자신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환영 위에 세워진 모래성과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금도 나는 망망 대해의 바다를 떠올리면 자유롭기보다는 무섭다고 느낀다. 정착할 곳이 사라진 바다는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전대미문의 가장 무서운 인간"이라는 니체의 말은 농담이 아니다. 니체의 텍스트를 마주치고 나서는 돌이킬 수 없다. 모르는체 하면서 파란 알약을 먹으면서 살 것인가 아니면 니체가 목숨을 걸고 지하로 내려가 탐사한 결과를 가지고 자기를 껴안고 살아갈 것인가.

 

놀라운 사실은 니체는 또한 "가장 은혜를 베푸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어디에도 닻을 내릴 육지가 없다는 것이 이제는 저 무한한 바다 어디로도 갈 수 있다는 즐거움이 된다. 매일 매일은 모험이 되고 권태라는 말은 내 사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삶은, 진리는, 나는 선한 것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잔인한 것, 더러운 것, 수치스럽다고 여기는 것들과 함께 만들어진 사티로스 - 잡종 그것이 바로 내 삶이다. 잊지 말자. "선한 자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나는 전대미문의 가장 무서운 인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내가 또한 가장 은혜를 베푸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나는 나의 파괴 능력에 상응하는 정도로 파괴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 이 두 가지 면에서 나는 긍정을 말하는 것과 부정을 수행하는 것을 구분할 줄 모르는 디오뉘소스적인 본성에 따르고 있다. 나는 최초의 비도덕주의자다. 따라서 나는 탁월한 파괴자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237쪽)

 

선한 자들은 결코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거짓 해안과 거짓 안전을 그대들에게 가르친 자는 선한 인간들이었다. 그들의 거짓말 속에서 그대들은 태어나고 보호받았다. 모든 것이 선한 인간들에 의해서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기만되고 왜곡되었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241쪽)

 

그리스도교적 도덕은 거짓을 범하려는 의지 중에서 가장 악의적인 것이며, 인류에 대한 진정한 마녀 키르케였으며, 인류를 타락시킨 장본인이다. 그리스도교를 볼 때 나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도덕 자체가 오류 자체라는 점이 아니다. 또한 오류가 승리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수천 년 동안 정신적인 문제에서 '선한 의지', 도야, 예의, 용기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점도 아니다. 나를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것은 자연의 결여다. 그것은 반(反)자연 자체가 도덕으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면서 법칙이자 정언명령으로서 인류의 머리 위에 걸려 있었다는 모골이 송연한 사실이다.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인가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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