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푹 잤다. ^^;
미미(고양이)가 침대 옆에 서서 계속 울어대는 통에 일어났다. 한 새벽에 왜 이렇게 울어대나라고 생각했는데, 일어나던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서 놀랐던것 같다. 늦었지만 아직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서 6시 반쯤 낭독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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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리스 비극에 관한 두 개의 공개강연'을 낭독했는데, 오랜만에 낭독하면서 고양되는 기분을 느꼈다.
오늘 읽은 텍스트는 말 그대로 니체의 '강연록'이기 때문에, 낭독을 하면서 니체의 강력한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비극에 관한 강연이라곤 하지만 사실 이는 니체의 예술론에 가깝다. 니체는 두 편의 강연을 통해서 고대 그리스 비극이 상연되는 공간을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그려준다.
니체에게 삶은 곧 음악이다. 음악이 없는 삶은 니체에게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무엇인가? 니체는 과장된 것처럼 보이는 시적 충동을 들려주는 아이스퀼로스로부터 너무 많은 대화를 도입한 에우리피데스까지의 역사를 비극의 타락, 해체라고 보았다. 즉 니체에게 음악은 예술의 한 분야가 아니다. 음악적 요소 - 즉 예술가뿐 아니라 예술을 보고 듣고 참여하는 사람들을 도취로 이끌수 있는 요소 - 가 없다는 그 어떤 것도 예술이라 불릴 수 없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현대인들에게 고대 그리스 비극의 첫인상이 '야만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스 비극은 단순히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장치가 아니다. 도리어 보는 사람들을 봄의 충동 아래서 흥분시키고, 개개인들을 묶어놓았던 결박에서 풀려나 개인 이전의 무아 상태로 들어가는 열쇠다. 비극을 통해서 그리스인들은 무아지경에 빠지고, 나도 너도 아닌 '다른 존재' - 조각난 개인의 집합이 아닌 '나들'이 출현한다.
커다란 운동장에 모여서 락콘서트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상상해보자. 어마어마한 스피커를 통해서 들려오는 드럼과 베이스기타 소리에 관객들은 하나가 된다. 개개인 사이를 막고 있던 모든 장벽들은 무너진다. 함께 소리를 치고 몸을 부딪치고 춤을 추면서 하나가 된다. 여기에는 나도 없고 너도 없다.
상상적 환영으로서 자아를 갖게 된 이후의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문자를 통해서 분리된 경계들을 무너뜨리고 순간적이지만 다시 한번 자아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경험. 라캉식으로 말한다면 무의식적 주체, 특히나 '간극, 균열, 공백으로서의 무의식'과 마주치는 순간이다. 일상에서 이런 순간을 마주친다면 두려움과 불안으로 대면할 힘을 갖지 못한다. 고통과 불안이 나를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예술의 순간이라면 허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그 '간극'에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회피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그 간극을 껴안아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니체가 스스로를 예술가-철학자로 만들어간 이유인것 같다. 또한 현대 철학이 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중 어느 한 사람이 순간이동을 해서 눈 깜짝할 사이 아테네의 축제 공연장에 가 있게 된다면, 그가 받는 첫인상은 낯설고 야만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 모든 시선은 저 아래 무대 위에서 멋있게 움직이고 있는 한 무리의 가면 쓴 남자들과 사람보다 더 큰 인형들에게 향해 있습니다. ... 2만여 명의 청중들이 알아들으려면, 이 형상들은 넓게 구멍낸 입을 통해 우렁찬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해야 합니다. ...... 더군다나 그것도 과장된 음, 부정확한 발음이 하나라도 있으면 가차 없이 비난하는 그런 청중들 앞에서 말입니다. 레싱의 표현에 따르면 아테네에서는 천민조차 세련되고 우아한 판단력을 갖추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집중령과 연습이 필요하며, 얼마나 오랜 기간 준비해야 하고, 이 예술적 과제를 위해 얼마나 많은 열정과 노력을 쏟아 부어야 했는가! (니체 <유고(1870~1873)> 16쪽)
우리는 단지 고대 드라마가 그런 전염병으로부터 활짝 꽃피었으며, 현대 예술의 불행은 그것이 비밀스러운 원천으로부터 솟아나지 않았다는 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자 할 뿐입니다. ...... 전능한, 너무나 갑자기 자신의 존재를 만천하에 공포한 봄의 영향으로 삶의 활력이 넘쳐흘러 황홀경에 빠지게 되고 자신이 마법에 걸렸다는 믿음과 환각 현상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 드라마는 어떤 사람이 복면을 하고 다른 사람을 속이려 할 때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한 사람이 무아지경에 빠져 자신이 변신했다고, 마법에 걸렸다고 믿으면서 시작됩니다. ... 우리는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됨으로써 스스로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연극을 관람하면서 우리가 느끼는 깊은 놀라움은 결국 여기에서 기원합니다. 우리가 딛고 서 있는 토대가 흔들리고 개인의 불용해성과 견고성에 대한 믿음 역시 흔들립니다. (니체 <유고(1870~1873)> 18쪽)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웅을 연기하는 배우가 마치 확성기를 통하듯 합창단을 통해 엄청나게 증폭된 감정으로 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합창단은 음악적으로 대중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폐를 가진 거대한 개인인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의 이 동일 음unison의 합창음악 속에 ... 어떤 윤리적 사상이 들어 있는가를 언급하는 것은 시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합창단은 비극 속에 나타나는 시인의 환상을 규정하는 것입니다. (니체 <유고(1870~1873)>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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