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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모든 것은 정신분석으로 통한다?

by 홍차영차 2025. 10. 15.

<유고(1830~1873)>에 들어 있는 니체의 강의들은 호메로스와 그리스 비극에 대한 가장 탁월한 해석이다. 유고집에 들어 있는 강의 제목을 보면 니체가 1870년대에 얼마나 그리스 비극에 매달려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무엇이 니체를 그리스 비극에 매달리게 했을까.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이성으로 오염된 세계, 데카당이라고 부르는 19세기 이전의 모든 것들을 그리스 비극을 통해서 정화하려고 했다. 놀랍게도 니체가 쏘아올린 불빛을 따라 그리스 비극을 읽다보면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던 신화의 수수께끼들이 스르륵 풀리는 것처럼 보인다. (<유고(1870~1873)>에 들어 있는 제목들 : 그리스 비극에 관한 두 개의 공개 강연, 디오뉘소스적 세계관, 비극적 사유의 탄생,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

 

니체의 해석에 기대서 읽어보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는 물론이고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로 이어지는 그리스 비극이 아주 흥미롭게 보인다. 자연스럽게 니체의 해석은 이후 소크라테스는 물론이고 플라톤의 철학을 이해하는데도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니체의 이야기는 모두 '정신분석학적'으로 읽힌다. 니체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프로이트가 말했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이는듯 하다. 어떤 면에서는 '정신분석학'이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을 잡아먹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너무나 유명한 개념이다. 프로이트를 몰라도 정신분석을 몰라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친부 살해, 근친 상간이라는 이야기를 호의를 가지고 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까. '현명한 마법사는 근친상간에 의해서 태어난다'라는 페르시아의 민간 신앙까지 있다고 하니 아마도 수천년 이상 내려온 격언일 것이다.

태어난다고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문자의 발명 이후) 자아를 갖게 된 이후부터는 인간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라는 자신의 자서전과 같은 책에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라는 부제를 붙이지 않았던가.

하나의 인간이 된다는 것은 집단과 다르고, 다른 사람들과도 다른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고, 또한 발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전의 (아버지에 의해서 구축된) 명령들에 저항하여 승리해야 한다. '생부를 살해'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자연을 거역하는 만행처럼 보이지만 모든 인간은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오히려 자연을 거역하지 못할 때 살아보지도 못하고, 한 순간도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한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니체가 처음에 아폴론과 디오뉘소스의 조화에서 디오뉘소스 철학으로 나아가게 된 이유이고, 또한 프로메테우스를 '가장한 디오뉘소스'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로메테우스가 가져온 지혜이자 기술인 불은 바로 이런 상징이다. 아니 프로메테우스의 삶의 궤적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자신이 된 인간'의 세계는 어떠한가? 그것은 '정당하며 부당하다.' "이것이 너의 세계다! 그것이 세계라 불리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는 이미 처음부터 있었다.

현명한 마법사는 근친상간에 의해서만 태어날 수 있다는 아주 오래된 페르시아 민간 신앙이 하나 있다. 수수께끼를 풀고 자기 생모를 해방시키는 오이디푸스와 연관지어 우리는 이 신앙을 이렇게 해석해야만 한다. 즉 예언적이고 마법적인 힘에 의해 현재와 미래의 마력, 개별화의 엄격한 법칙이 무너졌으며 자연의 고유한 마법까지 깨진 곳에서는, 다시 말하면 자연에 역행하는 엄청난 일이 - 이 이야기 속의 근친상간처럼 - 원인으로 제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비자연적인 행동을 통해 자연에 저항하여 승리하지 않는다면, 자연으로 하여금 자신의 비밀을 밝히도록 강요할 방법이 또 달리 있겠는가? 나는 오이디푸스 운명의 저 무시무시한 삼위일체 속에서 분명하게 이것을 인식했다. 이중 성격의 스핑크스라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푼 사람은 생부의 살해자와 생모의 남편으로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자연 질서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렇다. 신화는 지혜, 특히 디오뉘소스적 지혜는 자연을 거역하는 하나의 만행이라고, 또 자신의 지식으로 자연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자는 자신에게서도 자연이 해체되는 경험을 해야 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속삭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혜의 칼 끝은 지혜로운 자를 향한다. 지혜는 자연에 대한 범죄이다." (니체 <유고(1870~1873)> 중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 130쪽)

 

프로메테우스 전설의 가장 깊은 핵심 - 다시 말하면 거인이 되겠다고 노력하는 개인에게 주어진 모독의 필연성 - 을 이해한 사람은 동시에 이 염세주의 사상의 비아폰론적 성격 또한 반드시 느낄 것이다. 아폴론은 개인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자기 인식을 하고 절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되풀이하여 가장 신성한 세계 법칙으로서의 이 경계선을 상기시킴으로써 개별 존재들을 안정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 마치 모든 개체의 아틀라스가 되어 넓은 등에 그것들을 지고 더 높이, 더 멀리 가져가려는 듯한 이 거인적 충동은 프로메테우스적인 것과 디오뉘소스적인 것의 공통점이다. 아이스퀼로스의 프로메테우스는 이런 점에서 디오뉘소스를 가장한 인물이지만, 아이스퀼로스는 앞서 언급한 정의를 향한 깊은 열망 속에 자신의 부계 조상이 개체화의 신인 동시에 정의의 경계의 신이며 통찰의 신인 아폴론이라는 점을 은근히 폭로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이스퀼로스의 프로메테우스의 이중성, 즉 디오뉘소스적이며 아폴론적인 그의 성격은 다름과 같은 개념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존하는 모든 것은 정당하며 부당하다. 두 가지 면에서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너의 세계다! 그것이 세계라 불리는 것이다! (니체 <유고(1870~1873)> 중 '소크라테스와 그리스 비극 134~1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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