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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거인들(Titan)과 호메로스의 경쟁

by 홍차영차 2025. 11. 22.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 장면

 

 

<비극의 탄생>과 함께 니체가 말하는 '비극적 사유'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당시 니체가 썼던 다양한 글들을 낭독했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으로 '호메로스의 경쟁'이라는 글을 낭독했다.

 

새벽의 여명(黎明) 때문인지 아니면 한달동안 읽었던 그리스 비극에 관한 니체의 글 덕분인지 '호메로스의 경쟁'을 낭독하면서 알 수 없는 황홀감을 느꼈다. 텍스트에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호메로스 이전의 거인족들로 대표되는 승리의 잔혹함, 파괴적 충동을 알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신기하게도 문자 이전의 구술적 인간의 특성이자, 인간의 원형을 보여준다고 여겨지는 <일리아스>에도 거인족들(titan)은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니체가 아폴론과 함께 자주 거론하는 디오뉘소스도 없다. 그리스 신화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거인족들은 왜 <일리아스>에 등장하지 않을까.

어떤 면에서 보면 호메로스의 신화들은 거인족들을 땅 속에 파묻어버리고 난 뒤의 세계다. 즉, 호메로스의 신화는 거인족들의 잔임함과 카오스를 잠재우는 새로운 신화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때문에 니체는 "우리는 그리스의 수호신이 언젠가 그토록 가공스럽게 존재하는 충동을 인정했고 또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에서 출발"(333)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동시에 "모든 헬레니즘적인 것의 모태로 호메로스적 세계의 배후"에 "투쟁, 사랑의 욕망, 착각, 노화와 죽음 같은 밤의 자식들"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에서도 배제되는 것 같지만 거인들의 존재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그리스인들의 토대였다. 두렵고 무섭지만 인간들에게 불을 가져다주었다는 프로메테우스,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는 아틀라스를 잊을 수 없다.

 

'호메로스의 경쟁'을 낭독하면서 이 거인족들의 세계란 바로 무의식적 충동, 무의식적 주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밤의 자식들"이나 "승리의 잔혹함은 삶의 환호의 정점"이라는 말, "그리스적 권리의 개념이 사실 살인과 살인에 대한 속죄에서 발전"했다는 이야기들. 파괴적 충동이나 잔혹함이라는 단어들은 그 즉시 우리가 꿈 속에서 만나는 환상 즉 무의식의 세계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호메로스적 인간들은 사실 처음으로 거인들을 저 깊은 지하에 묻어버리기 시작한 세계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보면 아직 그 세계는 완전한 질서의 세계는 아니다. 제우스와 헤라, 아프로디테와 아테네는 각자의 영역을 갖고 있고 그 사이에 절대적인 위계(질서)는 없다. 제우스를 필두로 하는 12신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거인족들은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신들은 파괴적이고 잔혹하며, 그들에게 도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좀 더 살펴봐야겠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리잡은 질서 속에 나타난 것이 역설적으로 디오뉘소스였다. 해체의 신이자 카오스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디오뉘소스! (디오뉘소스는 동양으로부터 새롭게 등장했다!)

 

문자의 탄생과 함께 자아라고 하는 개인적 내면을 갖게 된다. 그런데 문자가 탄생하기 전에도 인간 - 호모 사피엔스는 있었다. 생각하고 상상하는 능력의 가지고 있던 인간! 거인족이 있었던 세계에서 제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12신으로 재조합되는 신화는 바로 무의식적 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인간들이 집단의식에서 벗어나 개인적 내면을 갖게 되면서 겪었던 변화가 아닐까라는 생각!

 

2026년 첫 낭독을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추신) 호메로스의 경쟁을 낭독하면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가 떠올랐다. 1시간으로 편곡된 버전을 올려놓았는데 특히 서곡을 들어보면 세계의 탄생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연이어서 말러의 1번 - 이곡 제목이 거인(titan) - 을 들어보면 뭔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토벤의 9번 합창 초반도 함께 들어보시기를.

 

말러1번은 아바도의 지휘가 좋은데 여기에서는 작동하지 않고, 링크 그대로 유튜브에서는 잘 동작함!

 

우리가 인간성에 관해 말할 때는 그것이 이미 인간을 자연에서 분리시켜 특징짓는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 인간이 자신의 가장 고귀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전적으로 자연이며 이 자연의 무시무시한 이중성격을 지니게 된다. 비인간적이라 여겨지는 그의 가공할 능력들조차 아마 비옥한 땅일지 모른다. 그것으로부터만 모든 인간성이 감동과 활동과 작품들을 통해 자라날 수 있는 그런 땅 말이다.

그래서 고대의 가장 인간적인 인간들인 그리스인들은 잔인함의 특성과 호랑이 같은 파괴충동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 그러나 이 특성은 그리스의 전체 역사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화를 통해 현대적 인간성이라는 유약한 개념을 가지고 그들과 맞서는 우리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다. ...... 그리스 조각가는 왜 전쟁과 투쟁들을 그토록 수없이 반복해 형상화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증오나 승리의 자만심으로 긴장한 힘줄의 사지를 내뻩고 있는 인간의 육체, 몸을 굽힌 부상자, 마지막 숨을 그렁거리며 죽어가는 자들을 조형할 수밖에 없었는가? 왜 <일리아스>의 전쟁 상에서 전체 그리스 세계는 환호성을 지르고 있는가? 나는 우리가 이것들을 충분히 '그리스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또 우리가 이것들을 일단 그리스적으로 이해하면 전율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니체 <유고(1870~1873> 호메로스의 경쟁, 330~331쪽)

 

오직 밤과 전율에 휩싸여, 잔혹함에 익숙한 환상의 산물들 속으로, 이 역겹고 가공스러운 신통기적 전설ㄷ르은 어떤 지상의 실존을 반영하는가? 그것들은 오직 투쟁, 사랑의 욕망, 착각, 노화와 죽음 같은 밤의 자식들만이 지배하는 삶을 반영한다. 헤시오도스의 시들이 풍기는 거의 숨쉴 수 없는 공기가 - 델피와 그 밖의 수많은 신전들에서 그리스 위로 불어오는 부드럽고 깨끗한 공기를 전혀 받지 않고 - 더욱 짙어지고 어두워졌다고 생각해보면, 그리고 이 뵈오치아의 진한 공기를 에트루리아 사람들의 어두운 육욕과 섞으면, 그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 우라노스, 크로노스와 제우스, 그리고 제우스에 대한한 거인족들의 전쟁이 해방처럼 생각되는 - 하나의 신화세계를 강요할 것이다. 이 짓누르는 분위기 속에서 투쟁은 행복이며 구원이다. 승리의 잔혹함은 삶의 환호의 정점이다. 그리스적 권리의 개념이 사실은 살인과 살인에 대한 속죄에서 발전했던 것처럼, 고귀한 문화는 첫번째 승리의 월계관을 살인에 대한 속죄의 제물을 바치는 제단으로부터 받는다. (니체 <유고(1870~1873> 호메로스의 경쟁,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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