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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그림이란 무엇인가 (feat.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

by 홍차영차 2025. 11. 30.

 

 
 
응시의 마지막 부분인 <세미나11>의 9번째 세미나의 제목은 '그림이란 무엇인가'이다.

라캉은 <세미나11>에서 미술 혹은 회화에 대해 계속 언급해 왔는데 굳이 9번째 세미나의 제목을 '그림이란 무엇인가'로 정했다. 라캉은, 메를로퐁티와 마찬가지로 시관충동 응시를 잘 보여주는 것이 회화라고 생각했고, 또한 이는 라캉의 주체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데에도 좋은 사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문자와 정신공간의 측면에서 보면 이는 더욱더 확실하다. 시관충동의 응시는 욕망하는 주체가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회화는 응시-길들이기이면서 동시에 응시를 드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라캉의 응시 개념을 바탕으로 좀 더 강하게 말하자면, 응시를 드러내지 못하는 회화, 응시를 은폐만하는 회화는 예술이 아니다. (그저 문자화된 그림일 뿐이다.) 라캉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예술의 정의를 명확하게 해 준다.

제욱시스의 그림이 펼쳐졌을 때, 그 그림이 얼마나 사실적이었는지 살아있는 새가 그림에 와서 부딪힐 정도였다. 그런데 라캉은 이 일반적인 해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그림이 실제와 똑같아서 새가 부딪힌 것이 아니라 제욱시스의 그림은 실제 포도가 드러내는 기호, 즉 포도송이가 만들어내는 매혹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새가 와서 부딪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파라시오스는 더욱더 큰 매혹을 보여주는 그림을 그렸던 걸까. 앞서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상상적 포획"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는다. 파라시오스는 더 사실적인 그림이나 더 매혹적인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파라시오스의 그림을 보고 싶은 욕망을 그렸다. 다시 말해서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가 자신의 그림을 보고싶어하는 욕망을 파악해서 '베일'을 그림으로서 눈을 가렸다. 그렇다면 그 '베일'이 너무나 사실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현상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보지 못한다. 사실 이미 어떤 의미의 장 속에서 볼 뿐이다. 그렇다면 제욱시스는 그 베일이 사실적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고, 그 베일 아래에 뭔가를 보고 싶다고 계속 욕망한다. 파라시오스가 그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 사람의 욕망을 작동시키는 무엇!

라캉은 바로 이것이 회화-예술이라고 말한다. 라캉은 "회화 창작에서 지금까지 거의 지적된 이 없다고 할 수 있는 특징"을 지적하고 있다. 회화는 그 대상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그리는가, 혹은 그림을 보면서 느꼈던 감각(인상)을 보여주는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라캉에게 회화는 그 회화를 보면서 그 아래에 있는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베일이 없으면 볼 수 없는 인간, 이게 바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인 것 같네요.

 

회화에 대한 라캉의 이야기는 단순히 회화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상징계 속에 갇혀버린 인간들, 법과 규범의 지층으로 채워진 인간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들어다보게 하는 것은 현대 예술이 당면한 과제가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20세기 문학, 미술, 음악을 본다면 현대예술이 전혀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주체화 구조의 역사적 변천에 의해 회화에서 일어난 온갖 변화를 생각해본다면 어떠한 공식으로도 저 수많은 목표들, 기교들, 무한할 정도로 다양한 트릭들을 다 담아낼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 저는 회화에는 '응시-길들이기'가 존재한다고, 말하자면 회화는 언제나 응시하는 이로 하여금 응시를 내려놓도록 만든다고 공식화했지만 그럼에도 표현주의는 응시에 노골적으로 호소하는 것이라는 말로 곧바로 저의 말을 정정한 바 있습니다. ...... 뭉크, 제임스 엔서, 쿠빈 등의 회화 ...... [반면] 저는 그 아름다운 예술의 기능의 근본 원리를 묻고자 하는 겁니다.

우선 메를로퐁티가 오래전부터 사유를 통해 맺어진 눈과 정신의 관계를 전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회화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그는 화가의 [창조적] 활동은 철학자가 우리를 주체의 위상 속에 붙들어두는 표상의 장을 조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지적했지요. 이를 위해 그는 세잔을 따라 본인이 "이 작은 파란색들, 이 작은 갈색들, 이 작은 흰샌들"이라고 불렀던 것, 이를테면 화가의 붗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터치들을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세미나11> 169~170 )

 

화가의 창작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구조화됩니다. 우리가 리비도적 관계의 구조를 파악해낸 이상, 이제 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예술 창작을 검토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나 싶은데요. ......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는 프로이트가 말한 의미에서의 창조, 말하자면, 승화로서의 창조와 그것이 사회적 장 속에서 갖는 가치입니다.

...... 저는 응시-길들이기가 또한 눈속임이라는 측면으로도 나타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작품을 대조하면서 저는 미혹의 자연적 기능과 눈속임 기능이라는 두 수준의 모호함을 분명히 지적했습니다.

...... 포도송이가 실물과 똑같이 그려져서 새들이 그것에 속았다는 것은 별로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 새들에게 포도가 먹잇감이 될 수 있으려면 좀더 기호에 가까운, 좀더 축약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반면 파라시오스의 예를 통해 우리는 사람을 속이려면 베일을, 말하자면 그 뒤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게 만드는 어떤 것을 그려 보여주면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 핵심은 바로 회화의 눈속임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자처한다는 것입니다.

눈속임은 무엇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만족시키는 것일까요? ...... 그림이 경쟁하는 것은 외양이 아니라 플라톤이 외양 너머에 있는 이데아라고 지칭한 것입니다. ......

이 다른 어떤 것이 바로 대상a이며, 이 대상a를 중심으로 눈속임을 제 영혼으로 하는 어떤 전투가 펼쳐지는 겁니다. (<세미나11> 172~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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