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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지옥의 문을 열어버린 (무의식적) 욕망

by 홍차영차 2025. 11. 18.

 

간극으로서의 무의식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앞서 라캉은 욕망의 유한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라캉 정신분석의 실천을 보면 욕망은 유한한 것으로 경험된다고 이야기한다. 라캉이 스스로 이야기했듯이 이는 일반적인 예상과 다르다. 전통 심리학에서 보면 "욕망은 통제 불가능한 무한한 것"으로 다뤄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자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욕망은 끝이 없고 충족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던가. 라캉이 말하는 욕망의 유한성이란 무엇인가.

 

일반상식과 다르다고 느꼈던 '욕망의 유한성'은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에서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구조 측면에서 보면 더 확실하다. 지금 나만의 욕망이라고 생각한 욕망은 사실은 아버지의-이름, 언어 구조의 효과로서 형성된 욕망이기 때문이다. 나만의 독특성이라고 생각했던 욕망은 이미 형성된 세계의 구조에 짜맞춰진 욕망이다. 당연히 이 욕망은 한계 속에서만 작동하고 경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이 한계 내에서 욕망은 외면만 바꿔서 반복될 뿐이다. 구조 속에서 형성된 욕망은 그 구조를 볼 수 없고, 구조를 넘어서는 욕망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전통 심리학의 영역에서는 신이 인간의 욕망에 남긴 것이라 생각되는 그 뭔지 모를 자취를 보면서 인간 욕망이 통제 불가능하며 무한한 것임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분석 경험이 확인시켜주는 것은 오히려 욕망의 유한한 기능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가능성보다도 더 어딘가에서 한계지어져 있는 것이 바로 욕망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나 중에 다시 다루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제가 '욕망'이라고 했지만 '쾌락'이라고는 하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지적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쾌락이란 인간의 가능성을 제한합니다. 다시 말해 쾌락원칙은 항상성의 원리이지요. 반면 욕망은 자신의 경계선, 자신의 고정된 관계, 자신의 한계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욕망은 바로 그러한 한계와의 관계 속에서, 쾌락원칙에 의해 부과된 문턱을 넘으면서 욕망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세미나11> 3 확실성의 주체에 관하여 54쪽)

 

 

간극으로서 무의식을 이야기 하기 전에 욕망의 한계를 이야기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간극으로서 무의식이란 기존의 질서가 정지하는 순간에 드러난다. 그렇다면 간극, 균열, 공백으로서 무의식이 드러나는 순간은 일정한 (언어적) 질서 속에 있던 욕망의 한계가 깨져버리는 순간이다. 이제 라캉 정신분석학의 지향은 기존 체계에 맞춰진 유한한 욕망의 한계를 깨버리는 것이 된다. 당연히 그러한 질서를 깨는 균열, 공백, 간극이 드러나는 증상은 무의식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된다.

 

초기 라캉의 정신분석의 방향은 상상적 욕망에서 벗어나서 상징계에 안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미나11>에서 라캉은 상징계적 구조에서도 벗어난 욕망으로 욕망을 해방시키려 한다. (작은)타자뿐 아니라 대타자로부터 벗어난 나! (그런데 이게 가능한 것인가?)

해방이라는 말은 참 멋져 보이지만 사실 언어적 질서를 벗어난 욕망, 욕망의 한계를 벗어난 욕망을 마주한다는 것은 무섭게 느껴진다. 프로이트가 처음 무의식을 발견했을 때, "지옥을 여는 것"(53)이라 선포한 것을 떠올려보라! "이제 육지는 없다."(니체)라는 말처럼, 돌아갈 육지를 생각지 않고 망망 대해를 보면서 모험을 하는 것을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육지가 없다는 것에 두려움을 가질 것이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일어날 일들을 기대하는 삶! 점차 라캉 정신분석학은 욕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미 짜여진 세계에 맞춰진 욕망에서 벗어나 무한한 것으로서, 공백이자, 간극으로서 무의식(적 욕망)과 마주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 간극으로의 무의식과의 대면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윤리적 위상으로의 무의식이란 것도 욕망의 무한성의 관점에서 보면 조금 더 실제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Wo es war, soll Ich werden이라는 말은, 무한으로 풀린 욕망에게 윤리적 방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주체는 '할 수 있기'때문이 아니라 '해야만 한다'라는 측면에서 생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라캉은 니체와 들뢰즈 사이를 연결해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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