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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무(無), 없음은 어떻게 주체의 위치에 서게 되는가

by 홍차영차 2025. 11. 13.

"언어적 구조로서의 무의식"이라는 것도 헷갈리는데 이제 라캉은 "간극으로서 무의식"을 이야기한다. 공백, 간극, 균열로서의 무의식! 사실 감각적으로는 이런 정의가 와 닿는다. 말 그대로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지 않는가. 하지만 라캉은 여러번 반복해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결코 상상력이 빚어낸 낭만주의적 무의식"(43)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무의식에 대한 탐구를 왜 하고 있는걸까? 무의식, 무의식 하다보면 도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무의식을 탐구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주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서다. 나도 모르게 느끼는 어떤 간극을 줄이고 싶어서다. 주체(主體)가 어떤 것이기에? 말 뜻 그대로 보면 주인된 부분(몸)을 가리킨다. 뛰고 걷고 생각하고 탐구하고 춤추고 울고 웃는 것의 주인된 것. 왜 주체가 어떤 것이냐가 문제가 되는가하면, 분명 어떤 일을 실행하고 결정할 때 내 마음대로 한 것 같은데 뭔가 그런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들때가 많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바로 이런 부분을 보면서 바로 여기 - 말실수, 농담, 꿈 - 에서 진짜 '주체'가 작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에 대해서 말하기 전까지 주체라고 하면 곧바로 의식, 자아를 떠올렸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이 의식이라는 것, 자아라는 것이 일종의 환영이라고 말하고, 그 밑에서 작동하는 어떤 것이 있다고 말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적 수준에는 주체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일한 무언가가 있음"을 발견했고, 무의식이 "의식의 수준만큼이나 정교한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의식을 원초적인 것으로 간주된 어떤 불투명한 의지, 많건 적건 언제나 의식 이전의 것과 연관시키는 이 모든 관념들에 반해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수준에는 주체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과 전적으로 동일한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의식도 의식의 수준만큼이나 정교한 방식으로 말하고 기능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의식은 자신의 특권처럼 보였던 것을 잃고 맙니다. 이런 이야기만으로도 벌써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이는 프로이트의 어느 텍스트를 보아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가령 <꿈의 해석> 7장 '꿈에서의 망각'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망각에 대해 프로이트는 오로지 시니피앙의 유희만을 참조하고 있지요.(자크 라캉 <세미나11>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 43~44쪽)

 

 

사실 "언어적 구조로서의 무의식"이라는 것은 언어적 구조의 효과로서의 주체를 가리킨다. 그런데 구조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체를 말하기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구조의 효과로서 주체란 아무런 힘도 없기 때문이다. 꼭두각시 인형이 떠오른다. 주체라고 부르지만 사실 주된 몸[主體]은 전체 구조이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라캉은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주체'를 이야기한다. 무의식적 주체!

 

라캉은 프로이트를 다시 독해하면서 말실수, 농담, 꿈 속에서 '자신이 실현되기를 요구'하고 있는 '어떤 헛디딤'이라는 양상을 발견한다. 헛디딤, 실패, 균열이 바로 '무의식적 주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 헛디딤, 실패, 균열은 항상 '뜻밖의 것'이고, 주체는 '뜻밖의 것'에 압도당하면서 즉, 자신의 예상한 것보다 더 많거나 적은 어떤 독특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간극으로서의 무의식'이고, '공백'으로서의 무의식이다.

 

 

그것은 '뜻밖의 것'입니다. 주체는 '뜻밖의 것'에 압도당함을 느끼며, 거기서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더 많으면서 동시에 더 적은, 그러나 어쨋거나 자신이 기대한 것에 비해 독특한 어떤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발견(물)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것은 곧 재발견이 되어버립니다. 게다가 그것은 상실의 차원을 수립하면서 항상 다시 사라질 준비가 되어 있지요. (자크 라캉 <세미나11>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 45쪽)

 

저는 프로이트가 무엇보다 무의식의 현상이라고 제시한 것의 작동 방식을 하나하나 열거한 바 있습니다. 꿈, 실수 행위, 재담 등에서 제일 먼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어떤 헛디딤이란 양상 아래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헛디딤, 실패, 균열. 말해진 문장이든 쓰인 문장이든 그 속에서 무언가가 발을 헛디디게 됩니다. ... 거기서는 다른 무언가가 자신이 실현되기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분명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어떤 기이한 시간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간극에서 발생하는 것은 '발견'처럼 나타납니다.(자크 라캉 <세미나11> 2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우리의 무의식 44쪽)

 

 

'간극, 균열, 공백으로서의 무의식'에 도달하면, 주체가 주체의 내부에 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뛰고 걷고 생각하고 탐구하고 춤추고 울고 웃는 것의 주인된 것'이 내 안에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 기묘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라캉이 내 안에 있는 외부성이라는 기괴해 보이는 말 - 외밀성(extimité)을 쓰거나, 에일리언을 언급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공백'이 주체가 된다는 게 말이 되나? 무(無), 없음이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냐는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간극, 균열, 공백이 어떻게 주인된 몸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의식적 세계, 자신이 형성하고 있던 타자의 언어가 멈출 때에만 '간극, 균열, 공백으로서의 무의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 이런 이유때문에 라캉은 '간극, 균열, 공백으로서 무의식'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무의식적 주체가 나타나는 것은 내부의 어떤 것때문이 아니라 외부(대상)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나로서 발견되려면 외부와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라캉은 이 무의식적 주체를 "하나의 기표 체계로부터 다른 하나의 기표체계로 도약(이행)"으로 간주한다. (백상현 <라깡의 정치학> 92쪽) "그것은 우리를 찾아온 하나의 새로운 증상적 기표에 흔들리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사건적 경험"(93쪽)이 된다. 이제 라캉에게 주체는 균열, 공백, 간극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적 주체를 만나기 위해 주목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증상이다.

 

 

* 라캉의 주체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곧바로 스피노자를 떠올리게 한다. 라캉이 10대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벽에 정리해서 놓았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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