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글에서 제기했던 질문 ("시각 중심적 세계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뭘까?"라는 질문과 함께, 2) "감정이란 어떤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 공감(共感)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서 두 번째를 살펴보겠습니다.

스피노자는 감정을 '신체의 변이'라고 정의합니다. 흔히 우리가 언급하는 기쁨이나 슬픔과는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묘사하는 감정들은 주로 실재적인 감정이라기보다는 '신체의 변이'의 단면을 잘라서 보여주는 개념으로서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이란 동적(動的)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체 변이 자체'만으로는 그것이 '슬픔'에 속한 것인지, '기쁨'에 속한 것인지 구분하기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참전군인으로 복무하던 아들이 돌아왔을 때도 커다란 신체적 변이 - 눈이 커지고, 심장이 뛰며, 눈이 나고, 온몸을 떨게 되는 - 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신체적 변이가 생깁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슬플 때도 눈물을 흘리고,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립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변이를 슬픔 혹은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는 이를 '역량'의 증가와 감소를 통해서 말합니다. 그런데 이를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이는 '신체적 변이'를 둘러싼 맥락을 뜻합니다. 즉 전후 신체적 역량의 증가를 일으키는 '변이'는 기쁨이 되고, '역량'의 감소를 일으키는 '변이'슬픔이 됩니다.
그 변이가 일어난 전후의 상황이나 배경이 감정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사례인데 2021년에 '한강에서 의대 1년생'이 죽었습니다. 또 거의 동시에 대학생 한명이 노동을 하다가 철재더미에 깔려서 죽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에 대한 사회적인 공감은 전혀 달랐습니다. 대한민국의 거의 대다수가 '의대생의 죽음'에 슬퍼하고, 그걸 넘어서 분노하면서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습니다. 그 실제적인 증거로, 신문기사 숫자로 드러납니다. 의대생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만건이나라 노동을 하다 죽은 대학생에 대한 기사는 1~2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똑같은 대학교 1년생의 죽음인데 왜 이렇게 공감의 차이가 컸을까요? 대학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욕망구조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공감(共感)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실에 동의한다거나 이해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감정을 겪고 있는 사람과 같은 '신체적 변이'가 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실제 고통을 겪는 사람보다도 더 큰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비슷한 배경이나 욕망을 갖고 있게 되면 당사자는 아니지면 실제로 비슷한 신체적인 변이를 갖게 되면서 슬퍼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회가 이런 솔직한 감정 표현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본다면, 감각 자체가 무뎌지고 게다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자신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집니다. 마음대로 슬퍼하지 못하고, 기뻐하지 못하는 이상한 사회가 되버리는 거죠.
돈이 최고인 세계에서, 이성과 효율성이 최고인 사회에서 왜 음악이, 예술이 중요하게 부상하고 있을까요? 예술을 통해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신체 변이' - 감정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인생에서 이 정도의 슬픔이나 기쁨, 분노와 경쾌함을 예술을 통해서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간적으로 열렸던 감각은 점점 더 일상에서도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신도 몰랐던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거죠.
여기서 다시 유메카 나카가와의 연주를 떠올려봅니다. '음악에 삼켜버렸다'고 하지만 나카가와와 조성진, 다닐 트로포노프가 보여준 연주모습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해줍니다. 자신도 몰랐던 그 커다란 분노와 화, 방안을 방방뛰면서 표현하는 기쁨을.
마지막으로 단순히 연주를 보고 듣는 것만으로 가능할까 의심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스피노자는 정서모방 감정역학을 이야기합니다. 아주어린 아이들이 모인 곳에서 한 아이가 울면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웁니다. 어른들조차도 어떤 한 사람이 시원하고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면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스피노자는 이를 정서모방 감정역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연장속성(물체/행위)과 사유속성(개념/관념)은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합니다. 내가 사과를 떠올리면, 그와 동시에 사과에 대한 신체적 흔적이 만들어집니다. 그렇다면 나와 비슷하게 생긴 친구가 울게 되면 그 모습에 대한 관념은 동시적으로 친구의 '신체적 변이-울음'과 같은 상태로 변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정서를 모방하게 된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서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으니까 기뻐진다고 할까요.
어떤 면에서 감정이란 별 것 아닙니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신체적 변이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 감정에 너무 매몰될 필요도 없습니다. 나카가와의 연주를 보면 op. 28의 15번 연주를 마치고 바로 다음 연주로 넘어가는데, 다음 연주를 보면 바로 전에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했던 연주자는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최고의 연주자가 연주할 때 자기는 없고 오로지 음악만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감정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의심할 수 도 있는데, 도리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쇼팽콩쿨 우승자는 일년에 똑같은 연주-피아노 협주곡-는 수백번 하게 됩니다. 매번 자신의 감정에 휘둘러서 한다면 (물론 자신의 상태를 잘 관리하는게 중요합니다.) 그 음악이 주는 감동을 제대로 줄 수 없습니다. 연주때마다 오로지 자기는 비워지고 음악만 존재하게 될 때, 비로서 좋은 연주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YUMEKA NAKAGAWA의 연주를 듣고 여러 생각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적게 되면서 내려놓게 되네요.
다시한번 쇼팽 콩쿨 두번째 라운드 연주실황 올려놓습니다. 처음부터 보셔도 좋을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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