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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꿈과 예술의 평행론 1

by 홍차영차 2025. 2. 9.

 

꿈-작업과 꿈의 태곳적 특성을 살펴봤던 지난 세미나는 나에게 하나의 변곡점이 될 것 같다.

속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예술 이외의 또 다른 길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2022년에 '사유이전의 사유, 몸의 사유'라는 주제로 공부를 하면서 '문자와 정신공간'이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니체 - 푸코 - 베이트슨으로 이어지는 횡단적 읽기가 도움이 된 듯하다. 이어서 2023년에는 '삶의 조건으로서 거짓'이라는 제목으로 구술성과 문자성을 좀 더 본격적으로 살펴봤다. 그러면서 문자의 발명과 함께 겉과 다른 속마음이 생겼고, 속마음과 행동(말) 사이의 간극이 점점 더 넓어지면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 마음의 충동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니체의 정의가 이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는 듯 하다.

문자(visual text)로부터 영상까지 온통 시각 중심적 세계에 살게 되면서 점점 더 구술성과 연관된 신체의 역량은 점점 떨어지는 듯 했다. 속마음(충동)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매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2024년 '들뢰즈와 언어'라는 주제로 고단하게 공부하면서 이러한 문제가 자연스럽게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전 글(정신분석과 예술)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라캉은 정말 매력적인 철학자/정신분석가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라캉을 대표하는 말은 당황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고 그 말 자체로도 사유를 확장시킨다. 프로이트-라캉을 재발견하면서 보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래서 2025~26년은 라캉을 중심에 놓고 '무의식 - 신체성 - 예술'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 *2025년은 라캉과 함께 - 전체 공부 계획 中 )

 

 

위에 인용한 글은 2025년의 공부 방향을 생각하면서 적었던 글의 일부다. 어떻게 하면 속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극을 줄일 수 있을까, 불안을 만들어내는 의식적 긴장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거짓으로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 이러한 질문들은 몇 년 전부터 나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이었다.

이에 대한 실천으로 발견한 것이 바로 예술활동이다. 문자의 발명으로 잃어가던 신체성에 대한 신뢰, 신체적 감각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예술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작업을 하거나 작품을 보면서 평소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각을 재생시키는 자극으로서 예술! 시각 지배적 세계에서 벗어나 오감의 우주를 있는 그대로 감응하는 것! 역설적으로 말해보자면 지금과 같은 예술의 번영은 문자에 대한 의존이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다면 없었을지 모른다.

문자 이전에 세계와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문자적인 세계는 있는 그대로 나에게 도달했다. 자연스럽게 우리들은 비문자적인 표현을 통해서 우주를 향해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세계와 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 문자가 들어서면서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잉여들은 없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이렇게 해결되지 않은 영역들이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2025년 공부의 키워드를 '무의식 - 신체성 - 예술'로 잡게 된 이유다.

예술을 통해서 새로운 감각을 회복한다는 것은 곧바로 신체성과 연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예술이라는 말은 단순히 눈으로 보고 즐기는 관념적인 것에 머물 수 없다. 매일 걷고 산책하는 것을 비롯해 뛰거나 수영을 하는 것, 매일 청소하고 음식을 만드는 작업들까지도 자신의 자극을 일깨운다면 모두 예술이 된다.

예술이 신체성과 연결되는 것은 감각을 새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무의식적으로 받는 자극들을 해소(제거)하기 때문이기도하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수많은 자극들을 받는다. 매일 매일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도시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시선들, 또한 자신의 시선에 잡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사물들. 수많은 냄새들과 소리, 미세하게 나를 덮쳐오는 감촉들에 우리는 매번 반응할 수 없다. 그렇게 살았다가는 미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예술활동을 하지 않던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자극들에 대응해왔던 것일까? 바로 꿈이다.

 

 

프로이트가 찾아낸 꿈-작업의 세 가지 기능은 압축, 전위, 시각적인 변환이다.

프로이트가 정의하는 꿈-작업이란 (무의식이라고 여겨지는) 잠재적 꿈-사고를 외현적인 꿈으로 변환시키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방향의 작업을 꿈-해석이라고 부른다. 놀라운 점은 꿈-작업의 기능이라고 불리는 압축, 전위, 시각적인 변환이 곧바로 예술작업의 기능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와의 반대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 비평(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것 같다.

수많은 책에서 예술가의 작업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이야기하겠지만, 프로이트의 꿈-작업이야말로 예술작업을 이해하는 아주 좋은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꿈-작업의 첫번째 기능은 압축이다. 잠재적 꿈-사고와 꿈이 일대일로 매칭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러개의 사고가 하나로 뭉쳐지기도 하고, 또 한 가지의 사고가 여러개의 부분으로 나눠지기도 한다. 의식적인 관찰로 이를 파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예술가 조차도 내가 왜 이런 '선'을 그었는지, 여기에 왜 이런 '덩어리'를 배치했는지 말하기 어렵다. 자신의 작품에 이런 멜로디와 구조가 나온 이유를 말할 수 있는 작곡가도 없다. 그리고 작품 자체에 대한 비평은 스스로가 아닌 다른 비평가에 의해서 이뤄질 뿐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꿈-해석과 마찬가지로 비평가의 감각과 자질가 중요하다. 꿈-해석처럼 예술-비평 역시 아주 자의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신기한 점은 프로이트 역시 공상 속에서 만들어낸 형상들과 달리 꿈-작업에서 시도되는 압축의 결과에 창조성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역시 꿈-작업이 예술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꿈속에서의 혼성 인물의 형성과 대응되는 것을 우리가 공상 속에서 창조해 내는 형성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현실에서는 서로 합치될 수 없는 요소들을 매우 간단한 하나의 통일체로 합성해 내는데, 이를테면 켄타우로스라든가 ... 이때의 '창조적'인 공상은 아무것도 '발명'해내지 못한다. 다만 서로 낯선 요소들을 하나로 합성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 꿈-작업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것이 시도된다. 즉 두 개의 서로 다른 생각을 압축시키는 과정에서 그 두 가지 생각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다중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찾아냄으로써 그 과정을 가능케 만드는 것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강의> 11강 꿈-작업 244~245쪽)

 

두분째 기능인 전위(傳位, displacement)도 흥미롭다. 프로이트는 전위가 전적으로 꿈-검열의 작용이라고 말하는데, 예술작업을 할 때도 역시 예술가의 무의식적인 검열 작용이 적용되지 않나 생각된다. 예술작업에서는 어느 정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기도 하지만 정말로 의식적으로는 어떤 의도를 갖고 한 것이 아닌 작업이 이뤄진다. 자신이 고흐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왜 이 그림 앞에서 떠나지 못하는지, 전시장을 떠난 이후에도 그 작품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그 작품이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던 억압된 무의식을 일깨우는 자극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베르메르의 작품에 대한 부분이 나오는데, 이 작품에서 프루스트는 별것도 아닌것 같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인 노란벽면을 언급한다. 바로 여기에 이 작품의 예술성이 있다고. 프루스트는 이 작품의 '노란 벽면'에서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베르메르 - 델프트의 풍경(1660)

 

꿈-작업에서 무엇보다 문제되는 것은 언어로 표현된 잠재적 사고를 대개는 시각적인 속성을 가진 감각적인 그리믕로 변환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들은 원래 그러한 감각 형상들에서 비롯된 것들이며, 최초의 재료와 전 단계는 감각 인상들, 좀 더 정확히 말해 그러한 것들에 대한 기억 형상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야 이러한 것들에 언어들이 결부되고, 그것은 다시 생각 내지는 관념과 결합된다. 꿈-작업은 이러한 생각에 퇴행적 처리를 거치게 하여 그것의 발전 과정을 되돌리는 것이다. (프로이트 <정신분석강의> 11강 255쪽)

 

꿈-작업의 마지막 기능은 시각적인 변환인데, 프로이트는 시각적 그림으로의 변환이 꿈-형성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나온 '시각적인'이라는 단어 옆에 '비문자적인(구술적)'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꿈-작업의 세번째 기능은 사실 잠재적 꿈-사고를 비문자적인 표현으로 드러내는 작업이다. 프로이트 스스로도 "시각적 그림은 사고가 변환되는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248)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잠재적 꿈-사고란 무의식이다. 꿈-사고가 무의식이라는 것은 의식화할 수 없는 사고라는 뜻이다. 그런데 꿈은 이러한 무의식적 자극을 제거하면서 잠을 지켜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완벽히 대응하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제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사고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비문자적인 표현이 필요하다. 꿈의 마지막이면서 본질이 시각적(비문자적) 변환이 되는 이유이고, 또한 예술 작업이라는 것이 바로 세계로부터 자신이 받고 있는 비문자적인 자극에 대답하는 것, 비문자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또한 바로 여기에 예술 가운데 문학의 어려움이 드러난다.

 

이렇게 해서, 장담하건대 이 책bouquin은 읽히게 될 것이다.

서적livre 형태로 팔리고 있는 나의 <에크리>같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에크리>는 읽히지 않기 위한 것이니까.

<에크리>가 어려운 것을 우연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선집의 겉표지에 '에크리'라고 적으면서 스스로 다짐한 바는 나에게 쓰인 것이란 읽히지 않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이것이 현재 나의 말하기dire가 도달한 지점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그것을 내 용법에 따라 밝혀두려 한다.

......

읽히는 것, 나는 바로 그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는 것은 무의식, 무엇보다 읽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의식에 헌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고집 피워야 할까? 당연하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쓰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쓰고 있다면 나는 후기를 쓰고postfacer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세미나를 나중에-지우고 있는posteffacer 것이리라.

나는 고집을 피울 것이다. 그것이 읽히려면 그렇게 해야 하니까. (자크 라캉 (자크-알랭 밀레 편) <세미나 11> 후기 中 419~420쪽)

 

꿈-작업만 읽어 보더라도 꿈과 예술의 매커니즘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꿈과 예술의 유사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쩌면 프로이트가 발견한 꿈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태곳적 특성과 유아성'은 꿈과 예술은 거의 하나처럼 작동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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