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을 읽기 전에 정신분석과 예술을 먼저 한번 읽어보시면 좋겠네요. ^^;
무의식에 대한 탐구가 급박한 이유는 데카르트(1596~1650)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무의식에 대한 억압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400년동안 급격하게 발전해온 문화 속에서 무의식, 충동, 욕망, 비이성과 연관된 것들은 마치 몹쓸 전염병처럼 취급되었다. 혹시라도 발견된다면 빠르게 진압되어야 하는 것처럼.
사실, 내가 지금까지 극히 참된 것으로 인정한 것은 무엇이든 감각들로부터, 혹은 감각들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각들이 가끔 속인다는 것을 포착했고, 한 번이라도 우리를 기만한 것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 현명한 처사다.
그러나 아마도, 감각들이 아주 작은 것 그리고 멀리 있는 것에 관해서는 가끔 우리를 속일 수 있겠지만, 같은 감각들로부터 길어낸 것이라해도 도저히 의심될 수 없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 난롯가에 앉아 있다는 것, 겨울 도포를 입고 있다는 것, 이 종이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 및 이와 유사한 것들이다. 게다가, 이 손들 자체 그리고 이 신체 전체가 내것이라는 것이 어떤 근거로 부정될 수 있겠는가?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광인과 나를 비교한다면 모를까 말이다. ... 그러나 저들은 제정신이 아니고, 만일 내가 그들의 어떤 예를 따라 한다면, 나 자신도 그들 못지 않게 정신나간 것으로 보일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제일철학에 관한 성찰> 문예출판사 37쪽
사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 속에는 이미 무의식에 대한 인식이 들어있다. 어쩌면 데카르트는 누구보다 명확하게 무의식적인 활동을 확인했기에, 예리한 메스로도 나눌 수 없었던 의식을 온전한 마음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렇게 묻힐뻔했던 무의식의 중요성을 파악한 철학자가 있다. 철학자들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스피노자(1632~1677)다. 그의 주저인 <에티카>를 보면 데카르트와 동시대에 살면서 그는 이성과 함께 감성, 무의식, 욕망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에티카> 2, 3부에서 욕망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명확하게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주체와 진리, 이성의 시대는 스피노자가 아니라 데카르트 철학을 선택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무의식, 욕망, 충동이 어떤 것인지, 어떤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 되었다.

정말 신기하게 생각되는 점은 바로 이렇게 이성이 충만하고, 과학적인 사고만이 인정받던 시기이 예술이 번성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데카르트 이전, 르네상스 이전에도 예술이 있었다. 하지만 근대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예술활동, 예술작품이 폭발했던 적은 없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라도 예술작품을 향유하고 싶어하고, 더 나아가 누구나 예술적 활동을 욕망한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근대 과학의 시대는 완전히 문자적인 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근대는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만이 인정되는 시대다. 문자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은 화폐화 될 수 없는 것,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우리 일상적 삶의 대부분은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로 이뤄진다. 새로운 친구를 만났을 때 그로부터 받은 감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잘생겼다, 좋은 대학을 나왔다, 뚱뚱하다, 멋진 옷을 입었다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표현들은 내가 받은 감응의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풀이나 꽃, 일상적 사건들에서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응들이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한 감응들은 어떻게 될까? 관념과 감정으로 남게 된다. 문제는 명확하게 문자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관념과 감정들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자면, 해소되지 않는 무의식적 충동들이다.
예를 들어 화해와 사과는 말로 이뤄지지 않는다. 물론 표현의 수단이 말과 문자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정작 미워했던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리게 되는 것은 말과 문자 이외의 잉여적인 표현들이다. 떨리는 목소리, 정성스럽게 쓰여진 글씨, 상기된 표정과 나를 바라보는 눈길과 같은 것. 아니면 모른체 건네주는 작은 사탕 하나에 모든 것은 풀어진다.
근대인들은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과 사물, 사건들로부터 감응을 받는다. 쉽게 말해서 여기저기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아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고 모르는 익명의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적었다. 당연히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 사건들도 별로 없었다. 아니 전달되지 않았다. 마을에 가장 큰 사건은 아마도 '철수네 집 강아지가 사라졌다' 정도였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는 매일 수백명 이상의 익명의 사람들과 마주치고, 실시간으로 전세계의 사건들을 보고 들으며, 인스타를 통해 수백 수천명의 친구들(?) 소식을 듣는다. 이런 감응, 감정, 긴장감,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근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비언어적이고 비문자적인 표현이다. 수많은 사람, 사물, 사건들로부터 받은 비언어적인 감응을 비언어적으로 표현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근대의 예술이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번성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클래식 음악, 재즈, 판소리, 사물놀이. 인상파 그림부터, 추상, 입체, 초현실주의 그림까지. 일상의 작은 사건을 다룬 소설부터 의식과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소설과 시. 이렇게 질적으로 다양하고, 양적으로도 많은 예술활동과 작품이 생긴 시대는 바로 지금이지 않을까.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술은 생존의 필수적인 욕구'라고 주장했다.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것, 예술활동을 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비언어적인 감응들에 민감해지는 과정이다. 자신의 마음을 흔드는 작품을 만났다는 것은 비언어적으로 자신이 느끼던 부분을 그 작품이 비정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예술활동을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의식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을 마주치는 과정이다. 프로이트-라캉식으로 말해본다면 무의식적 주체와의 대면이다. 물론, 무의식적 주체라는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에 대면할 수 없다. 혹여나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변해버린다.
프로이트-라캉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일차적으로는 나라는 존재는 의식과 다른 거대한 무의식적 지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또한 무의식의 메커니즘을 파악하면서 자신의 독특성에 맞는 비언어적인 표현 역량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누군가에는 글을 쓰는 작업이 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춤을 추거나 역도를 들고, 매일 10km를 뛰는 일, 혹은 식물을 기르는 작업,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의 발견 이후의 소크라테스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너 자신을 알라"는 '무지의 무지'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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