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검열의 영향 아래서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잠재적 꿈-사고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작용인 꿈-작업 그리고 압축, 전위, 시각적 변환으로 모호하고 애매해서 무의미해 보이는 꿈을 살펴보면서 그 아래에 있는 꿈-사고의 의미를 찾는 작업이 꿈-해석이다. 꿈-작업과 꿈-해석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이 두 작업이 곧바로 예술 작업 및 예술비평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꿈과 예술의 유사성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꿈이 잠을 못자게 하는 자극을 해소하는 잠의 수호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평소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자극들을 제거한다는 (내가 주장하는) 예술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꿈의 태곳적 특성과 유아성은 내가 이전에 생각했던 예술의 정의를 재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작품에서 나타나는 기괴함이나 파괴적 폭력성 혹은 성적 표현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가 예전에 극복하고 지나온 우리의 지적 발달 과정의 여러 상태에 상응하는 것이며, 우리의 사고 언어가 발달하기 이전에 우리에게 존재하고 있었던 상형 언어들이나 상징 관계, 또 어딘지 그와 비슷한 상활들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 작업의 이러한 표현 방식을 '태곳적 혹은 퇘행적'이라고 명명하려고 한다. ... 꿈-작업이 우리를 되돌려 놓고 있는 그 이전 시기는 이중적인 것으로서,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이전 시기, 즉 유년기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개개인이 자신의 유년기를 통해 인류의 모든 발달 과정을 어떤 형식이 됐든 축약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한에서 계통 발생적인 이전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강의> 13강 283~284쪽)




조금은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보이지만 그래도 신화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면 고야의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마네의 올랭피아도 마찬가지다. 이전의 현실성이 떨어지는 누드보다 현실적이지만 그렇다고 의식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성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베이컨이 그린 사람을 마치 푸줏간에 놓인 모습으로 그려놓은 작품들이나 너무나도 성적(sexual)하게 보이는 발튀스의 그림들을 보면 당황스럽다. 불과 몇년전에 발튀스의 그림을 전시했던 뉴욕메트로폴리탄박물관은 그림을 철거하라는 시민들의 청원을 받았다. 나 역시 발튀스의 그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다만 프로이트의 논의만 놓고 본다면 마네, 베이컨, 고야, 발튀스가 보여주는 작품들의 모습에는 태곳적 특성과 함께 유아성의 흔적들로 이해할만도 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순수한 얼굴로 계곡에서 잡은 청개구리를 돌로 쳐 죽이는 아이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본능적인 반응으로 자신을 방해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찢어버리고 제거해버리려는 모습은 사실 낯설지 않다.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엄마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기의 모습, 자기가 사랑하는 고양이나 인형에 끊임없는 애정공세를 펼치는 아이의 모습, 마치 그 대상을 삼켜서 완전히 소유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역시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는 망각된 어린 시절의 체험이라는 재료가 꿈속에서는 도달 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모든 특성이나 이기주의, 근친상간적인 사랑 선택 등을 포함한 아동의 정신생활 모두가 꿈속에서, 다시 말해 무의식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꿈은 밤나다 우리를 이러한 유아적 단계로 되돌려 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정신생활에서 무의식적인 것은 유아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프로이트 <정신분석강의> 13강 301쪽)
프로이트는 유아기의 기억들이 이후의 기억과 달리 희미한 흔적밖에 남겨놓지 않고 사라진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머니를 사랑하거나 동생을 죽이려고 하는 꿈은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지나면서 의식적 정신생활이 주를 이루게 되고, 우리의 정신생활에서 유아적인 부분은 무의식적인 부분이 이어받게 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무의식은 유아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여기서 유아적이라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개인적인 이전 시기 이면서, 계통발생적인 이전 시기를 함축한다.
다시 정리해보자.
꿈과 예술 모두 무의식적인 자극들을 해소하거나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꿈은 일상 생활에서 받았던 무의식들을 제거하면서 편안하게 자면서 쉴 수 있도록 돕는다. 다만 이러한 무의식적인 자극이 꿈에서 제거하지 못할 정도로 강할때는 자는 사람을 깨우는 역할도 맡고 있다.
여기서 질문 하나. 그렇다면 왜 근대 이후에 이렇게 다양한 예술이 꽃피었을까? 지금도 중세 이전에도 사람들은 잠을 잤고 꿈을 꾸었을 텐데, 왜 지금 이렇게 '무의식적인 자극'을 제거하려는 예술이 번성할까?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 근대는 자아의 시대이다. 문자의 발명 이후에 자아에 대한 관념이 점점 더 높아졌다. 내면의 복잡성이 점점 높아지면서 과잉 자아의 시대가 되었다. 즉 속마음과 행동 사이의 간극이 지금처럼 넓었던 적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쓴 가면이 마치 유일한 자신인것처럼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이전에는 잠을 푹 자고 나면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무의식적인 자극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과잉자아, 과잉감정의 시대에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굿 모닝!"이라는 단순한 말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한테 일 시키려고 하나?" 혹은 "좋은 아침 좋아하네." 혹은 "굿 모닝이라니 뭔가 나쁜 소식이 있나?"라고 상상하게 되는 복잡한 내면을 갖게 되었다. 즉 꿈이 해결할 수 있는 자극을 넘어서는 양과 질의 자극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마음과 행동의 간극이 넓어지면서 발생하는 불안감은 또한 양질의 잠을 잘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여기서부터 악순환이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면서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더욱 커진 불안감에 잠을 더 못자게 된다. 더더욱 나쁜 것은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충분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루동안 충분히 걷고, 뛰고, 활동할 때 자연스러운 잠이 이루어지는데 생각할 것은 많고, 또 움직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양질의 잠과 꿈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이런 상황이기때문에 잠과 함께 예술활동의 중요성이 커진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깨워줄 수 있는 활동으로서 예술. 무뎌진 감각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뭔가 새로운 마주침이 필요해진다.
매일 매일 청소를 하는 작업을 추천한다. 청소처럼 무용한 것이 없어보이지만 (예술처럼) 무념무상으로 청소를 하다보면 굳었던 신체가 깨어나고, 청소를 하다보면 평소 발견하지 못했던 부분 부분들을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청소하고 난 뒤에는 깨끗하고 정리된 환경은 좀 더 집중해서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매일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음식만들기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예술적인 활동이다.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재료 손질하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면서 자신의 감각을 믿고 음식을 만들다보면 전혀 새로운 감각과 생각들이 회복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펜을 들고 아무곳으로 가서 그림을 그려보라. 아주 평범한 나무를 그린다고 하더라도 평소와 전혀 다른 관찰력이 발휘된다. 햇살이 어떻게 비치는지, 나무줄기가 어떻게 휘어있는지, 나뭇잎의 색깔이 그냥 초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악기 연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악보대로 연주하지만 자신이 상상하는 음색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다양한 방법을 구하게 된다.
꿈에 대한 프로이트의 통찰이 놀랍다.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꿈은 무의식으로 통해는 지름길이라는 것에 공감하게 된다. 또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2'에서 읽으려고 하는 <꿈의 해석>이 더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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