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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낭독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by 홍차영차 2025. 1. 22.

오늘도 낭독 후에 달걀 후라이를 먹었다.


낭독을 하면 배가 고파진다고 했는데, 오늘도 그랬다.특히 니체의 텍스트를 낭독하고 나면 육체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어디론가 뛰어 나가 숲속을 뛰어다니고 싶고, 미친듯이 춤을 추고 싶은 욕망이 솟는다. 근질근질하는 육체를 잠재우기 위해서 오늘 나는 집에서 열심히 '홈트'를 했다. 

텍스트의 내용만으로는 이런 작용이 일어날 수 없다. 그 문자 밑에 있는 힘의 의지가 전달되어야 한다. 번역된 글이 이런 힘을 전달할 수 있을까? 내가 마주한 충동은 니체의 것일까. 아니면 환상 속에 내가 만들어낸 것일까. 혹은 니체가 말했듯이 '나는 이전의 모든 사람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사람'인 걸까.


<비극의 탄생>을 다 읽고 마지막 시간이었는데, <이 사람의 보라>에 나온 한 장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지 - 를 읽었다.

 

"나는 왜 몇 가지를 더 알고 있는가?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결코 문젯거리가 아닌 것에 대해 숙고한 적이 없으며 - 나는 내 자신을 허비하지 않았다. - 이를테면 진정한 종교적 난점들을 나는 내 경험으로는 알지 못한다." (349쪽)

 



당연히 니체의 영리함은 지식적인 영리함이 아니다. 더 많은 지식을 축적해서 나오는 영리함이기보다는 위버멘쉬의 고귀함, 스스로의 행위와 말이 그대로 기준이 되는 가벼우면서도 대담함의 용기를 보여주는 고귀함! 이런 고귀한 행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가벼움이다.

"내게 삶은 가벼워졌다. 삶이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을 요구했을 때 삶은 내게 가장 가벼워졌다."(373)



또한 머리가 아닌 근육에서 솟아나는 생각에 예민해져야 한다.

"야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생겨나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믿지말라 - 근육이 춤을 추듯이 움직이는 생각이 아닌 것도 믿지 말라."(353)



니체와 프로이트를 겹쳐 읽다보니 텍스트가 섞인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이란 어떤 면에서 '근육이 춤을 추면서 드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그런 육체의 충동을 무시할 때 억압이 일어난다. 언어화되지 않고도 이런 억압을 풀어낼 수 있다. "춤을 추자!" 어떤 기준이나 틀을 떠올리지 말고, 그저 몸을 움직여보자. 어떤 '선(line)'을 떠올리지 말고, 자신의 움직임이 바로 그 '선'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 두려워할 것은 없다. 실패란 없다. 끊임없는 시도 그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운명애'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이런 육체의 소리, 내장의 외침에 귀를 기울일 때에야 '반응'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서적을 그냥 '뒤적거리는' 학자는 결국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만다. 책을 뒤적거리지 않으면, 그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가 생각할 때는, 특정 자극에(읽은 생각들에) 응답하는 것이다 - 결국 그는 반응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학자는 자기의 전 힘을 기존의 사고들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데에 다 쏟아붙는다 - 스스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 자기 방어 본능이 그에게서 약할 대로 약해져버리고 만다 ; 그렇지 않다면 그는 책들에 저항할 것이다. 학자 - 일종의 데카당."(368)



https://youtu.be/tSsNFPk2vNA?si=sQjnHOph6r-rs14u

 

https://youtu.be/Y_8Ev_IAih8?si=DOqaymhX-ORcfZ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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