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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삶과 신화는 미학적 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

by 홍차영차 2025. 1. 19.

빛이 있어야 볼 수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빛이 없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본다.

모호함이 없는 신화는 없다. 고통과 어둠, 불협화음은 신화의 생명력이다. 신화는 어둠 속에서 탄생하고 어둠 속에서만 생명력을 가진다. 모든 것을 밝은 빛 아래 샅샅히 드러내겠다는 것은 삶에서 단 한 순간의 고통도 제거해버리겠다는 과욕일 뿐이다.
신화가 몰락했다는 것은 예술의 몰락이다. 그리고 어떤 신화도 허락하지 않는 시대에 삶은 관념 되어버린다. 분석되고 해체된 삶에는 "다음 순간을 체험해보고 싶은 어떤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베일 위에 형상을 드러내지만 또한 베일 속에 어둠을 만들어낸다. 예술은 어둠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감각하게 해준다.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다. 예술의 죽음은 신화의 몰락이다. 예술 없는 삶은 곧 소멸하게 된다.

 

 

비극의 저 몰락은 동시에 신화의 몰락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인은 자신도 모르게 모든 체험을 곧장 자신들의 신화에 결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니체 <비극의 탄생> 277쪽)
형상이 아무리 선명하고 명료하더라도 우리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개시하기도 하지만 은폐하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형상은 자신의 비유적 계시에 의해서 베일을 찢어 버릴 것을, 즉 비밀에 가득찬 배후를 폭로할 것을 요구하지만, 바로 저 형상의 지극히 투명한 명료성은 다시금 우리의 눈을 사로잡아서 그것이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을 막았다.
관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과 동시에 그러한 관조를 넘어서 동경하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두 가지 과정이 비극적 신화를 관찰할 때 얼마나 분명하게 병존하며 함께 느껴지는지를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미학적인 관객은 비극의 특유한 효과들 중에서 저 병존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나에게 증언할 것이다. … 비극적 예술가는 아폴론적 예술영역과 함께 가상 및 관조의 쾌감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비극적 신화는 이러한 쾌감을 부정하면서 가시적 가상세계의 파괴에서 더 큰 만족을 얻는다. (282쪽)

 

신화와 음악이 서로 밀접한 혈연관계에 있다면 한편의 변질과 타락이 다른 한편의 쇠퇴에 직결될 것이라고 추츨할 수 있다. 이는 디오뉘소스적 능력의 쇠약화는 신화 일반의 쇠약화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적 낙천주의의 비예술적이고 삶을 소진시키는 본성은 오페라, 우리의 추상적이고 신화 없는 삶, 오락으로 전락한 예술, 개념에 의해서 인도되는 삶에서 자신을 드러내었다. 288
음악과 신화는 똑같이 어떤 민족의 디오뉘소스적 능력의 표현이며 서로 분리될 수 없다. 290쪽

 

피에르 술라주(19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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