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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호메로스

호메로스읽기(3) - 호메로스적 인간, 아킬레우스

by 홍차영차 2015. 11. 13.

호메로스적 인간, 아킬레우스

호메로스 읽기(3)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리스와 트로이아 연합군이 생사를 건 전쟁을 치르고 있는데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전리품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것도 전쟁의 막바지인 전쟁 10년차에. 특히 빼앗긴 전리품이 여인이었다는게 더 마음에 걸린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아킬레우스는 여자때문에 나라를 버렸던 것인가? 더욱이 이렇게 화만 잘내는 아킬레우스가 호메로스 이후 그리스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니! 영웅이라고 하면 우리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절대적 능력과 환경과 상관없이 도덕을 지키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런데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것 같다. 조그마한 일에도 화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고, 삐치는 아킬레우스. 호메로스 사회는 왜 이렇게 쩨쩨해 보이는 사람을 최고의 인간상으로 보았을까?



힘과 용기의 시대

호메로스 사회는 어떤 가치를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길래, 이처럼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아킬레우스를 최고의 인간이라고 여겼을까? 호메로스 시대가 갖고 있던 시대적 특성을 살펴보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트로이아 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기원전 13세기로 청동기 시대였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를 치뤄야 했고, 각각의 전투에서 보여준 힘과 용기에 따라서 명예와 부가 배분되었을 것이다. 즉 호메로스 시대에 힘과 용기는 살아가는데에 있어서 필수적이었으며 또한 최고의 가치였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보면 최고의 인물은 이제껏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그리스의 전사 아킬레우스일수밖에 없다.

아킬레우스가 최고의 전사였다는 것은 <일리아스>에 나오는 전투를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일리아스>가 보여주는 삶과 전쟁에 결부된 다른 사건들을 보면 그는 그저 감정적인 인물로 보일뿐이다.  영웅이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인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감정을 한치도 숨김없이 드러내며 그리스 최고의 영웅이자 자기 종족의 왕으로서의 위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트로이아 전쟁은 그리스 전체 사회와 트로이아 전체의 싸움이었고, 아가멤논은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설령 자신이 받은 전리품(상)을 빼앗겼다고 해서 군대의 전체 수장을 죽이려 하는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아킬레우스의 감정적 행동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후 자신의 성질에 못이겨 아가멤논에게 거침없는 욕을 퍼붓고, 공식적인 사과를 받기 전에는 더 이상 전투를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생각에 잠겨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발 앞에 쓰러져 남자를 죽이는 헥토르를 위해 꺼이꺼이

울었고,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때로는 파트로클로스를 

위해 울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울음소리가 온 집 안에 가득 찼다. 24권 509행이하


종잡을 수 없는 아킬레우스의 면모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아 죽어간 수많은 동료들에 대해서 얼음처럼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 자신의 절친인 파트로클로스가 죽었다는 말에 아킬레우스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정말 미친 사람같이 분노했다. 또한 <일리아스>의 마지막 권에서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프리아모스 왕이 요청했을 때, 아킬레우스는 이전의 분노를 다 잊었다는듯 그의 말을 너무나 쉽게 들어준다. 정말 이제 막 사춘기에 들어선 아이처럼 왔다갔다하지 않는가.


아킬레우스에게 탄원하는 프리아모스 왕


여기서 다시 질문 하나! 아킬레우스는 단순히 힘이 쎄고 최고의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최고의 영웅이라고 칭송받았던 것일까? 호메로스 시대가 말하는 힘과 용기가 무엇인지 관찰해보자. 그들에게 힘과 용기는 머릿 속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원래 용기가 있지만 바쁜 일이 있어서 지금은 도울 수 없어요.’라는 말은 그들에게 통용될 수 없었다. 그가 영웅으로서 보여주는 힘과 용기는 순간 순간 펼쳐지는 구체적인 상황과 환경 속에서 드러나야만 한다. 수많은 전쟁과 전투 속에서 피치못할 사정이 발생한다. 그만큼 변명의 여지도 많다. 하지만 호메로스 시대에 ‘마음으로는 도와줄려고 했다’는 통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속마음은 없다. 위험하고 갑작스러운 순간에 그가 보여준 그 행동이 바로 그의 용기이자 힘인 것이다.



호메로스적 인간

호메로스 시대의 힘과 용기는 이처럼 눈으로 보이는 구체적인 행동을 지칭한다. 여기에서 호메로스적 인간의 특징이 드러난다. 호메로스적 인간이란 의지와 행동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호메로스적 인간에게는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투명하게 드러낼 뿐이다. 지금처럼 영혼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든지, 이성으로 판단한 후에 행동한다는 생각이 없다. <일리아스> 13권에 나오는 헥토르와의 싸움에서 아이아스가 말했던 것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아이아스가 했던 ’나의 팔’과 ‘두 발’은 그 자체로서 자신을 대표할 뿐이다. 호메로스적 인간에게 육체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은 모두 동등하게 자신을 지칭한다. 나의 팔과 두 발은 ‘총체’인 나이면서 그 부분이기도 하다.


“벌써 내 가슴속 마음은(thymos)

더욱더 전쟁과 전투를 갈망하고 있으며

아래로 두 발과 위로 두 손이 근질근질하오.”

그에게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가 이런 말로 대답했다.

“꼭 그처럼 지금 창을 잡고 있는 내 무적의 팔들도

근질근질하오. 그리고 안에서는 용기가 솟고

아래로 두 발은 날 것만 같소. 그래서 나는 일대일이라도 좋으니

사기충천한 프리아모스의 아들 헥토르와 기꺼이 싸우고자 하오!” <일리아스> 13권 73행 이하


감정과 행동이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은 호메로스적 인간에게 꿍쳐둔 마음, 다시 말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환경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로 전의 행동과는 모순돼 보이는 행동도 할 수 있다. <일리아스> 23권에 나오는 전차 경주는 이런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틸로코스는 전차 경주를 하면서 비열한 방법으로 메넬라오스를 제치고 1등을 했다. 그런데 경기가 끝난 후 메넬라오스가 그의 비열함을 고발하자 안틸로코스는 지체 없이 사과했다. 안틸로코스를 저주했던 메넬라오스 역시 그 사과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이런 행동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줏대가 없는 인물이고, 힘에서 밀려서일까? 메넬라오스와 안틸로코스는 힘과 용기에 부족함이 없을 뿐 아니라 각각 종족의 왕으로서 트로이아 전쟁에 참여했다. 그만큼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다. 안틸로코스의 비겁한 행동은 그 상황에서 신적인 미혹(ate)때문에 발생할 것이고, 악한 마음을 ‘계획’하거나 ‘품은 것’이 아니다. 호메로스적 인간들에게 ‘속마음’은 없다. 신들의 개입만이 있을 뿐. 그렇기에 안틸로코스는 쿨하게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메넬라오스가 안틸로코스에게 몹시 화가 나고

속이 상해 그들 사이에서 일어섰다. (중략)

“안틸로코스여! 전에는 그토록 슬기롭던 그대가 하는 짓이

그게 뭐요? 그대는 훨씬 못한 그대의 말들을 앞으로

들이밀어 내 솜씨를 모욕하고 내 말들을 방해했소이다. (중략)”

“그대도 아시다시피 젊은 사람은 마음은 급하고

생각은 얕아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오.

그러니 마음을 가라앉히시오. 내가 얻은 암말을

기꺼이 내드리겠소. (중략)”

“안틸로코스여! 내 자진하여 그대에 대한 노여움을 거두어들이겠소이다. (중략)

그러니 내 그대의 간청을 받아들이겠소. 그리고 내 마음이 

오만불손하거나 냉혹하지 않음을 여기 모인 다른 사람들도 다

알도록 비록 내 것이긴 하지만 이 암말도 그대에게 주겠소이다.” 23권 566행 이하


호메로스 시대의 힘과 용기는 말로서, 머릿 속 생각만으로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용기는 순간순간 드러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 영웅 아킬레우스는 삶의 순간 순간에 너무나 충실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그는 분노하고, 울고, 사랑하고, 프리아모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호메로스적 인간은 그가 어떤 존재인가(being)라는 본질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행한 일(doing) 그 자체에 의해 투명하게 이해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



<일리아스>의 마지막 영웅, 아킬레우스

<일리아스>는 호메로스적 인간의 대표로서 아킬레우스를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그를 호메로스적 인간의 마지막 인물로서 표현하고 있다. 아킬레우스는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행동으로 영웅적 면모를 드러낸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의 업적에 기대거나 미래의 운명에 속박되지 않았다. 그는 현재의 상황에서 해야할 일들을 했을 뿐이다. 호메로스적 인간의 대표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후 벌어진 무구 쟁탈전을 보면 사회가 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킬레우스가 죽고 나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그리스군 가운데 큰 다툼이 일어났다. 다툼의 주인공은 ‘그리스에서 두 번째로 용맹한’ 큰 아이아스와 ‘지혜에 제우스 못지 않은’ 오뒷세우스였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아킬레우스의 무구가 단순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무구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시대에 최고의 영웅이 누구인가를 판별하는 것이다. 힘과 용기라는 호메로스적 가치가 지속된다면 당연히 무구는 아이아스가 차지했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에 다툼이 벌어졌다는 것은 사회적 가치가 변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를 보면 이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그리스군 내부는 이로 인해 엄청난 분열이 있었고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결국 그 무구는 ‘용기’있는 아이아스가 아니라 ‘꾀’가 많은 오뒷세우스가 차지하게 된다. 즉 <일리아스>를 마지막으로 호메로스적 인간은 새로운 인간형과의 충돌에서 패배했다는 뜻이다. 이는 호메로스의 다른 책 <오뒷세이아>가 새로운 영웅상으로 오뒷세우스를 그리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5.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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