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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호메로스

호메로스 읽기(1) - 트로이아 전쟁과 호메로스의 문제

by 홍차영차 2015. 9. 10.

트로이아 전쟁과 호메로스의 문제

- 호메로스 읽기(1)-







그리스, 오해와 이해 사이

그리스는 우리에게 항상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온다. 서구 문명의 기원인 그리스, 직접민주주의의 꽃을 피웠던 아테네. 또한 제우스와 헤라로 대표되는 그리스 신화로부터 철학의 기원으로 일컬어지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얼마전 그리스로 여행을 떠났던 ‘꽃보다 할배’까지. 하지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그리스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조금만 살펴보면 우리의 상상과 다른 모습이었음에 놀라게 된다.

   직접민주주의의 정치적 활기와 그리스 전체의 문화적 번성을 이끈것으로 생각하는 페리클레스 시대(기원전 5세기)는 실상 주변 도시국가들을 탄압하면서 빼앗은 부를 가지고 만들어낸 아테네 제국시대의 결과였다. 또한 철학 체계를 처음으로 수립한 플라톤(기원전 4세기)은 자유롭고 안정된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퇴락해가는 혼란의 시기에 아테네에서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고민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는 도시국가 아테네의 시대보다 600~700년 앞선 청동기 시대를 배경(기원전 13세기)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의 호메로스는 청동기 시대 사람이 아니라 그보다 늦은 기원전 8세기의 철기시대 사람이다. 이런 실정이다 보니 서구 문화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를, 호메로스를 제대로 알기는 쉽지 않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상상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는 먼저 호메로스를 읽기 전에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의 배경이 되는 트로이아 전쟁의 역사성 그리고 저자 호메로스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트로이아 전쟁과 하인리히 슐리이만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는 모두 트로이아 전쟁을 주요 소재로 쓰고 있다. 그렇다보니 책을 읽다보면 아킬레우스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트로이아의 목마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하면서 트로이아 전쟁이 실제로 일어났었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이런 의심들은 21세기 우리들에게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이미 기원전 6세기부터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 서사시의 역사성을 의심하는 부류가 있었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학자들이 함께 트로이아 전쟁 및 이와 연관된 사건은 모두 문학적 상상이라고 합의하기도 했다. 

짧게 잡아도 2000년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던 것을 사실로 확정시킨 사람은 누구였으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이만(Heinrich Schliemann, 1822-1890)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트로이아 전쟁의 문학적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증명한 것이 전문적 학자가 아니라 아마추어였다는 사실이다. 슐리이만의 자서전적 영화에 보면 그가 트로이아의 프리아모스 성을 발굴하러 떠날 때, 동료 학자들은 혹시라도 그가 유적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시기심과 그의 발굴 시도는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로 만든 집’을 찾는 것과 같다는 조소를 동시에 보내기도 했다. 전문적 학자들로서는 호메로스의 텍스트와 상상적 직관만으로는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1870년 발굴을 시작한 이래 슐리이만은 트로이아와 뮈케네 문명의 옛 유적들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하인리히 슐리만과 트로이아의 보물을 걸치고 있는 그의 아내
 

슐리이만이 발견한 것은 트로이아 유적이었을까? 그가 발굴을 시작한 이후 발견된 9층의 유적 중 어느 것이 트로이아 도시인지에 대한 논쟁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무모한 것처럼 보였던 그의 시도가 없었더라면 트로이아, 뮈케네의 문명은 여전히 역사 속에 덮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슐리이만의 도움으로 호메로스 서사시를 더욱 생생히 상상할 수 있으면 또한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그 시대와 정신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새로운 사상과 인간의 탐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뮈케네 문명에 대한 발굴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호메로스와 소리꾼

앞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지은이의 이름으로 ‘호메로스’를 당연한듯이 써왔다. 하지만 이 이름에 대한 진위 논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호메로스의 문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호메로스라는 인물은 한 사람인가 아니면 창작 집단인가 그리고 한 사람이라면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를 모두 호메로스가 썼는가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의 문제는 지난 200년동안 계속해서 논쟁이 되어온 것이기에 어느 것이 맞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논쟁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구전문학’의 특성을 살펴보는 것은 호메로스를 읽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같다.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는 문자로 적힌 서구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졌다. 즉 호메로스 이전까지 서사시는 구전문학의 형태로 전해졌다. 즉 호메로스를 읽을 때는 우리는 ‘소리꾼’과 관련된 몇 가지 특징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 그리스 초기 서사시는 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이었다는 것이다. 떠돌이 소리꾼들이 우리나라의 판소리처럼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를 지어서 불러왔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호메로스의 이름으로 불려졌다는 것이다. 구전문학에서 청중들은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기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중간 중간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반복적으로 이야기해 주어야 했다. 호메로스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주제, 인물, 구조의 반복은 이런 이유때문이다. 

또한 소리꾼들은 이야기에 대한 청중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붙잡아 두어야만 했다. 이야기가 시들해지고 재미없어지면 그들은 집에서 쫓겨나 새로운 곳을 향해서 떠돌이 생활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야기의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것이 상당히 중요했다. 마치 미니시리즈로 기획되는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이 항상 다음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서사시 공연장의 분위기는 <오뒷세이아>에 나와 있는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세이렌들이 뱃사람을 호리는 소리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들은 가던 길을 잊고 영원한 파멸 속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세이렌들이 불렀던 노래가 바로 트로이아 전쟁과 관련된 노래였다.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의심되는 점이 생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달되었다면 이들이 역사적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물론 서사시가 문자로 담겨지기 전 서사시의 가장 큰 특징은 전승의 유동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리꾼들이 이야기를 전수받는 시기를 살펴보면 그 의심이 풀어진다. 소리꾼들을 일반적으로 10~12세 정도의 어린 시절에 노래기술을 전달 받고 있었다. 소리꾼들은 ‘아무런 고민이 없는 시기’에 이야기를 전달했고, 어떤 이는 “자면서도 이야기를  전수”받았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서사시들은 트로이아 전쟁이라는 오랜 세월 감추어진 과거의 사건들을 정확하고 충실하게 재생할 수 있었다. 소리꾼들이 보유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는 미세한 차이에도 본질적으로 역사적 실제를 담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들


호메로스 읽기

호메로스를 읽는다는 것은 슐리이만이 시도했던 고고학적 발굴 작업과 비슷한 것 같다. 발굴 작업에서 혹시라도 운 좋게 유물을 발견했더라도 그것이 어떤 것인지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의 방식을 근거해서 그 기능을 유추하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일리아스>, <오뒷세이아>가 전해주는 삶의 모습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하인리히 슐리만이 발견했던 헬레네의 목걸이를 찾는 것보다 더 힘들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호메로스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인간형들이 보여주는 행동과 선택은 지금의 다른 그 무엇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우리 손에는 전체 퍼즐의 몇 조각밖에 들려 있지 않다. 완성된 그림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트로이아 유적 발굴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과 호메로스 서사시가 소리꾼에 의해 전달되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호메로스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호메로스의 이야기를 하나의 그림으로 고정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에 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순전히 호메로스가 전해주는 텍스트에 기초로 내 자신이 소리꾼이 되어 상상력을 가지고 읽어내려가다보면 <일리아스>, <오뒷세이아>에 숨겨진 유물같은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호메로스 읽기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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