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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호메로스

호메로스읽기(5) - 운명애와 호메로스의 영웅들

by 홍차영차 2015. 12. 22.

운명애(愛)와 호메로스의 영웅들 

-호메로스 읽기(5)








호메로스적 인간은 의지와 행동 사이에 간극이 없는 투명한 인간이다. 그래서 이런 호메로스적 인간은 펼쳐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순간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맘 속에 아무련 미련을 남기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트로이아 전쟁의 대표적인 두 영웅이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호메로스적 인간의 특징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들은 불리한 상황에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서슴치 않고 전투에 나서고,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도리어 죽음으로 돌진하는 듯한 선택을 한다. 왜일까?



헥토르를 죽이는 아킬레우스



운명애(Amor fati)

호메로스적 인간과 운명은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운명’이라는 말을 예전부터 정해진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서 운명적이라는 말은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인 느낌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의지와 행동 사이에 아무런 분절이 없는 호메로스적 인간과 운명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을까?

<일리아스>의 인간들이 마주했던 운명은 바로 죽음이다. 그들은 트로이아 전쟁을 통해서 매일 매일 죽음을 경험했다. 즉 그들은 용감하든, 비겁하든, 가난하든, 부유하든 그리고 지위 여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일리아스> 전쟁을 살펴보면 인간을 비롯하여 올륌포스의 모든 신들이 이 전쟁에 직간적접으로 참여하고 있다.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인도한 아프로디테는 트로이아 편을 들었고, 반대로 헤라는 그리스군의 승리를 위해 제우스를 속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인간은 인간들끼리, 신은 신들끼리 싸우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신들과 인간은 죽음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가장 다르다. 엄청난 싸움을 하더라도 신들은 죽지 않기때문에 항상 선택의 여지가 남는다. 반대로 인간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임을 알기에 자신의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서 엄숙하기까지한 태도를 보일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인간은 운명애적 태도를 갖게 된다.



이제 내가 어리석어 백성들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으니

트로이아인들과 옷자락을 끄는 트로이아 여인들을 볼 면목이

없구나. 언젠가는 나보다 못한 자가 이렇게 말할테니까

‘헥토르는 제 힘만 믿다가 백성들에게 파멸을 가져다주었지.’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그러니 아킬레우스와 맞서

그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도시 앞에서

그의 손에 영광스럽게 죽는 편이 나에게는 나을 것이다.  22권 104행 이하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고 ‘죽음’은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헥토르는 10년의 전쟁을 거치면서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아킬레우스와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매일처럼 죽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인간이란 죽을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라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트로이아가 이 싸움을 끝내려면 아킬레우스라는 운명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을. 헥토르는 아킬레우스가 그리스 최고의 전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헥토르의 선택은 그저 죽기를 맞이하는 것과는 다르다. 헥토르는 이 싸움에서 다른 동료들처럼 자신이 죽을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 운명을 껴안기로, 사랑하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헥토르가 트로이아의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킬레우스라는 운명, 모든 인간을 그가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마주치기로 했을 때 영웅으로 불멸할 수 있었다.



영웅의 조건

헥토르의 죽음에서 알 수 있듯이 호메로스의 영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 죽음을 직면할 때(amor fati) 가능했다. 아킬레우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이 트로이아 전쟁에서 최고의 전사로 이름을 날리면서 단명(短命)한다는 운명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킬레우스 역시 헥토르처럼 그는 자신의 운명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를 죽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죽어라! 내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와 다른 불사신들께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때에 언제든 받아들이겠다.”고. 그는 헥토르와의 마지막 싸움이 있기 전에 아가멤논의 횡포에 화가나서 더 이상 싸우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아킬레우스는 절친 파트로클로스와 헥토르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기로 한다.



분노란 똑똑 떨어지는 꿀보다 더 달콤해서

인간들의 가슴속에서 연기처럼 커지는 법이지요.

꼭 그처럼 저는 인간들의 왕 아가멤논에게 분노했지요.

하지만 아무리 괴롭더라도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필요에 따라 가슴속 마음을 억제해야지요.

이제 저는 나가겠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기 위해, 제 죽음의 운명은 제우스와 다른 불사신들께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때에 언제든 받아들이겠어요. 18권 109행 이하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그리고 이 운명을 직면하기로 한 아킬레우스에게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문제만이 남게 된다. 이제 운명은 더이상 그에게 무거운 짐이나 정해진 길이 아닌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이제는 더 이상 운명(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자신이 가야할 길에 후회나 미련을 품지 않게 되었다. 운명(죽음)이란 피한다고 없어지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다른 순간에 똑같은 기로에 서게 만드는 것이 운명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운명을 스스로 직시할 수 있을 때, 아킬레우스는 영웅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된다.



호메로스적 인간과 운명애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고 전투에 나간 파트로클로스,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은 헥토르, 헥토르를 죽이고 트로이아 전쟁에 우뚝 선 아킬레우스. 이들은 모두 호메로스적 인간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과감히 마주친(amor fati) 영웅들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말하자 슬픔의 먹구름이 아킬레우스를 덮어버렸다.

그는 두 손으로 검은 먼지를 움켜쥐더니

머리에 뿌려 고운 얼굴을 더럽혔고

그의 향기로운 옷에도 검은 재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자신은 먼지 속에 큰 대 자로 드러누워

제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중략)

한편 안틸로코스는 눈물을 뿌리고 울며 아킬레우스가

영광스런 마음속으로 신음하는 동안 그의 두 손을 잡았으니

혹시 그가 칼로 제 목을 베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18권 22행 이하



먼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살펴보자. 아킬레우스는 몇 번이나 파트로클로스에게 신신당부했다. 트로이아군들을 그리스 진영에서 몰아낸 뒤로 더 전진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하지만  파트로클로스에게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은 파트로클로스는 다시 시작된 전투에서 연전연승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트로이아인들은 그의 무구를 보고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복귀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승리가 바로 파트로클로스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충고를 무시하고 자신이 아킬레우스인양 계속해서 진격해나갔고, 현재 자신의 싯가를 넘어서는 행동을 하게되었다. 즉 그는 ‘세 번이나’ 트로이아의 높은 성벽을 기어올라 정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힘을 넘어서는 욕심이었고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빼앗는 행위였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그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는 순간부터 예상할 수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무구를 빌려주면서 이미 파트로클로스의 운명(죽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킬레우스는 그의 출전을 막을수 없었다. 주변의 동료들은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었고, 그렇다고 아가멤논의 사과도 없는데 자신이 싸움에 나설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바로 이 상황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의 운명을 맞이한 것이고 아킬레우스 역시 그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헥토르의 죽음 역시 비슷한 측면으로 바라볼 수 있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이고 그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아킬레우스의 무구로 갈아입었다. 헥토르 역시 그 자체로 영웅이었지만, 아킬레우스의 무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은 헥토르는 새로운 무구를 입고 나온 아킬레우스에게 죽게 된다.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었을 때 아킬레우스는 깊은 슬픔에 잠겨 무시무시하게 통곡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전투에 복귀한다. 하지만 아킬레우스가 전투에 나간 것을 단순히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복수심 때문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호메로스적 인간인 아킬레우스는 나갈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의 무구를 입고 나간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 그 자신을 상징했다. 그의 무구를 보았을 때 트로이아인들은 그를 아킬레우스라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도망친 것이다. 반대로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은 파트로클로스에게 싸움을 걸었다는 것은 바로 아킬레우스에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이런 정황에서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은 것이다. 헥토르는 파트로클로스를 죽였지만 사실 이는 아킬레우스(의 명예)를 죽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여기에서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 대한 분노를 이유로 파트로클로스의 복수를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리스 최고의 전사라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없게 된다. 이제 아킬레우스는 이 도전을 피할 수 없다. 명예를 지키려면 나가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이후 그는 급하게 아가멤논과 화해하고 헥토르와의 싸움을 준비한다. 그리고 그는 나가서 헥토르를 죽이고 자신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직면한 아킬레우스. 그리고 순간 순간의 상황에 즉각적인 행동으로 답하는 호메로스적 인간 아킬레우스는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호메로스적 인간이란 행동에 있어서 투명한 인간이다. 학자들 중 몇몇은 ‘호메로스적 인간’이 가능한 것은 인간의 내면 혹은 주체가 아직 형성되지 못한 단순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호메로스적 인간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죽음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체득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는 때 가능한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단면적으로 보면 아킬레우스가 분노하고 그 분노를 거둬들이는 간단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가 분노했던 과정과 그 사이 펼쳐지는 전쟁 그리고 그 전쟁 속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죽음을 맞이하는 영웅들의 모습은 바로 ‘인간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다. 3000년 전 이야기 <일리아스>를 왜 읽느냐고? 바로 지금의 나,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일리아스>를 함께 읽어보자고 꼬셔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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