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전리품
- 호메로스 읽기(4) -
호메로스적 인간 아킬레우스는 어쩌면 트로이아 전쟁의 마지막이 됐을지 모르는 그 순간에도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있었다. 왜? 전리품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도대체 ‘전리품’이 뭐길래?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전리품은 하나의 ‘물건’, 상품에 불과하다. 더 값진 전리품을 준다면 빼앗긴 물건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물건은 그저 무엇을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 이상의 인격적인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아킬레우스는 빼앗긴 것보다 더 많은 물건을 주면서 사과를 청한 아가멤논을 거절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킬레우스에게 전리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전리품은 그것을 차지한 사람과 동등한 ‘인격적인’ 위치를 누렸다. <일리아스>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무구’ 쟁탈전에서 이런 전리품(물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좀 더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 품으로 돌아온 브리세이스
한편 양군은 계속해서 시신을 둘러싸고 날카로운 창을 휘두르며
쉴 새 없이 덤벼들어 서로 상대방을 죽였다. 그리고 청동 갑옷을
입은 아카이오이족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자들도 더러 있었다.
“친구들이여! 우리가 지금 속이 빈 함선들로 돌아간다는 것은
명예롭지 못한 짓이오. 그럴 바엔 차라리 검은 대지가 입을
벌려 우리 모두를 집어 삼키기를!” 17권 412행 이하
아킬레우스가 살았던 청동기 시대에는 살아가기 위해 끊임 없이 싸워야만 했다. 그래서 용기와 힘이 중요한 시대였다. 당연하게 사람들은 전쟁과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스러움에 따른 공정한 분배를 정의롭다고 여겼을 것. 그런데 전쟁 속에서 용맹함은 어떻게 드러날까? 아마도 영웅들의 용맹함은 그의 동료들에 의해 목격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얼마나 많은 적군을 죽였는가에 의해 판단되었을 것이다. <일리아스>의 이야기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온 시신 쟁탈전이나 무구 쟁탈전은 이런 관점으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전사들은 적군을 죽일 뿐 아니라 적군의 무구와 시신을 가져올 정도로 용맹하다는 것을 경쟁했던 것이다. 상대방의 무구를 쟁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힘과 용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며, 무구를 빼앗기는 것은 거의 자신의 죽음과 동일한 것이다. 그 중에서 최고는 시신 쟁탈전이었다. 양쪽 모두에게 시신을 빼앗기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고, 동시에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즉 전리품이나 무구에 대한 영웅들의 태도는 그것 자체가 호메로스 시대의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호메로스 시대에 전리품이 어떤 의미인지, 아킬레우스가 분노와 연결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보이는 힘과 용기, 전리품
전리품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가 분노했던 이유와 더 이상 전투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아킬레우스는 먼저 이렇게 말했다.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은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소.” 전리품의 분배는 전투가 끝나면 이루어지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함께 싸웠던 동료들은 누가 용기를 드러내며 적을 물리쳤고, 누가 누구의 목숨을 구했는지 지켜봤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리품의 분배는 단순한 물질적 분배가 아니라 그에 대한 동료들의 인정, 즉 공동체적 인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그의 말을 정리해 보면 전리품을 빼앗긴 것에 대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사적인 감정때문이 아니었음을 알게된다.
아가멤논에게 분노하는 아킬레우스
첫째, 아킬레우스가 보기에 아가멤논이 자신의 전리품을 빼앗아 간 것은 순간의 실수로 일어난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9권에서 말하는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쉬지 않고 적군과 싸워봤자 고맙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 뻔하다”고 말하고, “나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싸우느라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했지만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요.”라고 한탄한다. 즉 이번만이 아니라 계속해서 전리품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 가운데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빼앗아 갔던 것이다. 아킬레우스가 보기에 아가멤논의 행위는 그리스 연합군의 수장으로서 이 시대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고, 그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자가 하데스의 문만큼이나 밉소.
가슴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하는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오.
아무튼 나는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바를 말하겠소.
다른 다나오스 백성들도 마찬가지요. 쉬지 않고 계속 적군과
싸워봤자 고맙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 뻔하니 말이오.
뒷전에 처져 있는 자나 열심히 싸우는 자나 똑같이 몫을 받고
비겁한 자나 용감한 자나 똑같은 명예를 누리고 있소.
일하지 않는 자나 열심히 일하는 자나 죽기는 매일반이오.
나는 언제나 목숨을 걸고 싸우느라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했지만,
그것이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9권 312행 이하
또한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아가멤논 한 사람만을 향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는 9권에서 “다른 다나오스 백성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즉 자신의 전리품을 빼앗아 간것은 아가멤논이지만 다른 모든 그리스군들이 이를 보고 침묵으로 동조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전리품의 분배는 분명히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운 동료들 모두가 인정한 결과로 받은 것인데,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을 빼앗아갈 때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즉 아가멤논 뿐만 아니라 동료들 모두가 침묵하면서 자신의 공적과 명예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정당한 인정을 못받는 사회에서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싸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볼 때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개인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무너져가는 호메로스의 사회 질서를 세우려는 공적인 분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정당하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단순히 무너진 명예를 세우려는 체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결과적으로 실존의 문제였을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특히 아가멤논이 자신을 재류외인으로 취급했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면서 분노했다. 재류외인이란 공동체에 속하지 않으면서 거주하는 사람을 말하다. 재류외인은 어떠한 의무도 없지만 또한 아무런 책임도 없다. 즉 재류외인의 삶에 공동체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호메로스 시대에 공동체 밖으로 내던져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공동의 적을 막는 것뿐 아니라 의식주 자체를 혼자서 할 수 없는 사회였다. 아킬레우스가 이전에 아무리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있더라고 홀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처럼 마트에 가서 돈(전리품)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서 사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실존의 의미에서 피할 수 없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제우스의 후손인 준족 아킬레우스가 이런 말로 대답했다.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여, 백성들의 지배자여!
그대가 한 말은 대체로 내 생각과 같은 것 같소이다.
하나 내가 아무런 명예도 없는 재류외인인 양
아트레우스의 아들이 아르고스인들 앞에서 내게 무례하게 대하던
일들은 생각할 때마다 나는 마음속으로 화가 치민다오.
그러니 그대들은 돌아가 내 말을 전하도록 하시오.
나는 현명한 프리아모스의 아들 고귀한 헥토르가
아르고스인들을 도륙하며 뮈르미도네스족의 막사들과 함선들이
있는 데까지 쳐들어와 함선들을 불사르기 전에는
결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9권 643행 이하
아킬레우스는 전리품이라는 ‘물질’을 잃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동안의 전쟁을 함께 해온 동료들과 공동체 전체에게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전쟁 10년차에 일어난 일이다. 전쟁을 10년동안 했다는 것은 그곳에서 함께 생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사들이 그곳에서 농사를 짓지는 않았을 것. 당연히 트로이아 주변의 성들을 침략하는 전투가 계속 있었을 것이고, 그 때마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을 것이다. 그리스에서 가장 용맹한 전사였으니 언제나 가장 큰 공을 세웠을 것은 당연지사! 전리품이 바로 그 사람에 대한 공동체적 인정이자 명예라 할 때 그리스 전체 수장이 전리품을 빼앗아갔고 동료들은 그것을 방관했다. 이렇게 볼 때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명품, 아니 전리품
지금까지의 분석을 보면 전리품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명예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인정이기도 하다. 즉 전리품 자체가 그 사람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에 대한 태도, 특히 자동차와 명품 핸드백과 같은 ‘물건’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태도는 이것과 다른 것일까?
많은 여성들은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가치가 더 높아진다고 생각하고, 대부분의 남성들은 더 비싼 자동차가 바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준다고 여길 때가 많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여주는 ‘물건’에 대한 태도는 호메로스적 인간들이 보여주는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아킬레우스에게 전리품은 그것 자체가 자신의 싯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매 순간마다 자신의 용기를 보여 주었고 그에 맞는 전리품을 얻었다. 즉 전리품은 단순히 그것을 소유했다는 결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게 된 과정, 삶의 방식을 포함한다고 봐야 한다.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경기에서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들을 상품으로 나누어 주는데, 여기에서도 그들은 다양한 경기를 하면서 전리품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주어야 했다. 간단히 말해서 공짜로 얻은, 자신의 힘과 용기를 보여주지 못한 전리품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킬레우스가 죽고 난 후 그의 ‘무구’를 누가 차지할 것인가는 엄청난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의의 무구를 갖는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었던 명예, 공동체의 인정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후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누가 갖게 되는가는 바로 그 시대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시금석이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는 7살짜리 아이가 주식부자가 되는 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식과 물질이 그의 가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적 인간들에게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다. 7살짜리 아이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차지한다는 것은 호메로스 시대의 사회질서상 이해할 수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시대의 전리품은 이처럼 그 시대의 질서와 영웅들의 투명한 행동방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가 물건을 추구하는 모습은 사람과 물건 사이에 있었던 인격적인 연결이 모두 끊어지고 그 사이에 얼마나 큰 단절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2015.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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