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일종의 과학책이다.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사물들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 직접 낭독해보니 이 과학책은 아주 시적이다. 시적이고 싶어서 시적이라기보다는 사물들은 원래 '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인것 같다. 과학 이후에, 이성과 의식의 발명 이후에 우리들이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시간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바로 사물들로부터
그것의 감각이 유래한다, 세월 속에 무엇이 지나가버렸는지,
어떤 사물이 현재 남아 있는지, 또 어떤 것이 다음에 나올 것인지.
누구도 결코 시간을, 사물의 움직임을 고요한 정지에서 분리된
자체적인 것으로 지각하지 못함이 인정되어야 한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1권 59쪽)
시간에 대한 관찰이다. 얼마나 흥미롭고 재미있는가. 우리는 너무나 의심없이 시간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사실 누구에게라도 '시간이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당황할것이다.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우리가 믿는 건 그저 추상화되고 보편화된 개념이다. 원을 12조각 내서, 시침이 움직이는 것을 시간이라고 믿을 뿐 아닌가.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더 재미있다. 사실 시간, 물질과 공간(진공)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해명하기 어려운 개념들이다. 공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는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의 시대에 살면서도 아직은 뉴턴이 정의해온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이라는 공간을 더 편하게 여기고 있다. 우리가 바라보고 인식하는 현실은 일종의 환상, 왜곡이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다.
모든 것이 물체적 본성으로 모든 방면에서 에워싸여
잡혀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들 안에는 빈곳이 있기 때문이다.
......
왜 우리는 어떤 사물들이 다른 것드롭다 조금도 더 크지 않은 크기인데도,
무게에 있어서는 앞서는 것을 보게 되는가?
왜냐하면, 만약에 납 속에 있는 것과 같은 만큼의 물체가
양털 뭉치 속에 있다면, 그런 만큼 무게가 나가는 것이 마땅하니 말이다.
모든 것을 아래 방향으로 누르는 것이 물체의 역할이니까.
하지만 반대로 빈 공간의 본성은 늘 무게가 없다는 것이다. (1권 49쪽, 51쪽)
니체와는 다르지만 낭독하기에도 참 좋다. 시적인 말투와 충분한 여백을 드러내는 배치가 낭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것 같다. 형식만이 아니다. 그 내용들도 지금의 감각과 인식과는 다른, 절대적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것 같다. 루크레티우스 낭독, 첫 시간 - 아주 만족스럽다!
우선, 일깨워진 바람의 힘은 바다를 뒤흔들며,
거대한 배들을 동댕이치고 구름들을 흩어버린다.
때로는 잡아 찢는 질풍으로 내달리며 들파넹
거대한 나무들을 흩어놓고, 높다란 산들을
수풀 뒤흔드는 돌풍으로 혼란시킨다. 그렇게 바람은 미쳐 날뛴다,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사납게 군다, 위협하는 으르렁거림으로.
그러므로 분명히 바람의 보이지 않는 몸이 있어,
그것이 바다를, 그것이 땅들을, 그것이 또한 하늘의 구름까지
쓸어가고 갑작스레 휘젓는 돌풍으로 잡아채는 것이다.
그것은 부드러운 물의 본성이 갑작스레 넘쳐난
흐름에 실려 갈 때와 다르지 않게, 흘러가며
쓰레기들을 흩어놓는다. - 그런 흐름은 억수 같은 비에
높은 산들로부터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물이 붇게 한다,
숲의 파편들과 수목들을 통째로 몰아 동댕이치며.
든든한 다리들도 닥쳐오는 물의 갑작스런 힘을
버텨낼 수가 없다. 큰 비에 생긴 거친 강은 그와 같이
거센 힘으로 다릿발에 들이닥친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허섭스레기들을 가져다주고, 물결 밑에 거대한 돌들을
굴리며, 무엇이건 여울에 맞서는 것을 덮친다.
그러니 바람이 부는 것도 그와 같이 움직여야 한다.
그것이 마치 힘찬 흐름처럼 어느 방향으로든
할 때면, 물건들을 앞에 밀쳐나가고 계속적인 추진력으로
돌진하며, 때로는 휘도는 회오리로
잡아채고, 갑작스레 맴도는 난류로 실어간다.
그러므로 거듭거듭 말하건대, 바람의 보이지 않는 몸은 존재한다.
그 하는 일과 방식에 있어서, 눈에 보이는 몸으로 되어 있는 거대한 강들의 경쟁자로 드러나니 말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46~47쪽)
우리들은 여러가지 사물들의 냄새를 느낀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코로 다가오는 것을 결코 알아채지 못한다.
뜨거운 열을 보지 못하며, 냉기를 눈으로
잡을 수 없고, 목소리들을 알아보는 데 익숙지 않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물체적 본성으로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감각을 자극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체가 아니라면 어떤 것도 닿거나 닿아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물결 부서지는 바닷가에 걸린 옷들은
눅눅해진다. 반면에 같은 옷들이 햇볕에 펼쳐지면 말라버리낟.
그렇지만 어떤 방식으로 물의 습기가 자리 잡는지,
어떤 방식으로 열기에서 다시 달아나버리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습기가, 눈들이 어떤 식으로도 볼 수 없는
작은 부분이 되어 흩어지는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46~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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