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낭독하고 있지만 매번마다 놀라게 하는 니체를 만나게 되네요. (참, 새벽낭독 3개월차, 4월이 되니 6시가 되도 날이 훤합니다. 사진은 낭독마치고 7시10분경 찍은 사진인데 한낮같은 느낌입니다.) 오늘은 기억하고 싶은 구절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새벽낭독을 하고 나서 인상적인 구절들을 적어 놓는데, 오늘은 노트북에 적는데만 30분은 걸린 것 같네요.
""육지"는 이제 없다."라는 문장이 현재 우리의 마주한 상황을 정확하게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니체를 읽다보면 들뢰즈가 리좀적 사유나 기관없는신체, 노마드와 같은 개념을 말한 이야가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됩니다. 리좀적 주체로 살기는 너무 어려운 것 아닌가? 기관없는신체가 되라는 것은 '나'로서 살지 말라는 것 아닌가? 부랑자처럼 살아갈 수 없는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런 불평은 마치 돌아갈 "육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향수'에 사로잡힌 것과 같다는 것.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를 죽이고 나서 "신은 죽었다"라고 자유를 외쳤을지 모르지만 실상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지평선"을 지워버린 것이고, 태양으로부터 벗어난 지구에 타고 살게 된 상황입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어떤 속죄의 제의와 성스러운 제전을 고안해내야 할 것인가?"라는 니체의 고백에 공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니체는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하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대답합니다. 아무런 규칙도 도덕도 없는 세상, 지평선도 공기도 없는 진공 상태에 떨어져 있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두려움.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으면 언제든 새로운 도덕을 실험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직면(face to face)하는 것. 그럴 때에만 "육지가 없다"는 사실이 슬픔이 되지 않고 새로운 대양, 끝도 시작도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현실을 함께 맞이한다면 더 좋은것 같네요.
"육지"는 이제 없습니다. 함께 즐거운 항해를 이어가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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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문> 발췌
122 - 무한한 수평선
우리는 육지를 떠나 출항했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왔을 뿐만 아니라, 우리 뒤의 육지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러니 우리의 배여 앞을 바라보라! 네 곁에는 대양이 있다. 대양이 항상 포효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 그것은 비단과 황금, 자비로운 꿈처럼 그곳에 펼쳐져 있다. 하지만 언젠가 이 대양이 무한하다는 것을 그리고 무한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을 때가 올 것이다. 오, 한때 자신을 자유롭다고 느끼다가 이제 새장의 벽에 몸을 부딪히고 있는 새여! 마치 육지에 자유가 있었다는 듯 향수가 너를 사로잡는다면 그것은 슬픈 일이다. “육지”는 이제 없다! 199
123 - 광인
그대들은 밝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나는 신을 찾고 있노라!” 외치는 광인에 대해 들어본 일이 있는가? 그곳에는 신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기 때문에 그는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신을 잃어버렸는가? … 신이 아이처럼 길을 잃었는가 ? … 신이 숨어버렸는가 … 광인은 그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꿰뚫는 듯한 눈길로 그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 -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가 대양을 마셔 말라버리게 할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지우개를 주었을까? 지구를 태양으로부터 풀어놓았을 때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 신을 매장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신의 시체가 부패하는 냄새가 나지 않는가? 신들도 부패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누가 우리에게서 이 피를 씻어줄 것인가?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어떤 속죄의 제의와 성스러운 제전을 고안해내야 할 것인가?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 … 그가 말했다.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방황 중이다. 이 사건은 아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지 못했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 사람들이 이야기라기를 그날 광인은 여러 교회에 뛰어들어 신의 영원 진혼곡을 불렀다고 한다. … “이 교회가 신의 무덤과 묘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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