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썼던 낭독의 사유와 묵독의 사고라는 글에서 낭독과 묵독의 차이에 대해서 말했다. 그때도 낭독과 묵독의 차이를 조금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은유와 경구들로 가득한 <차라투스트라>에 이어서 연속으로 <우상의 황혼>이라는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책이 서로 다른 출판사였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우상의 황혼>에는 박찬국이라는 번역자의 각주가 양적으로도 큰 부분을 차지했다.
오늘 처음으로 <선악의 저편>을 낭독했는데, 이전과 달리 읽는데 뭔가 좀 서걱서걱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로 이전에 읽었던 텍스트가 <아침놀>이기도 했고, <아침놀>과는 다른 출판사의 번역본으로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침놀>(1881)은 니체의 사상의 연대기로 보면 중기 초반에 쓰여진 책이고, <선악의 저편>(1889)은 <차라투스트라> 이후에 쓰여진 책이다.
내용이나 문체(style)로 보더라도 <아침놀>은 직관적 사고에 가까운 경구들이 주를 이루지만, <선악의 저편>은 9개의 장들이 나름 논리적인 분석으로 이뤄졌다. 또한 우연히도 <아침놀>은 거의 주석/각주가 없는 '책세상' 출판사의 번역으로 낭독했고, <선악의 저편>은 '아카넷' 출판사에서 나온 박찬국의 번역으로 읽고 있다. 아카넷 번역에는 수많은 주석/각주가 있는데 때로는 책의 반이 넘는 부분들이 주석으로 채워져있다. 시선이 분산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이유때문에 박찬국의 번역을 읽는다는 것은 니체를 읽으면서 그의 해석에 크게 영향을 받게된다.)

<선악의 저편> 아카넷 출판사

<선악의 저편> 책세상 출판사
이번에 <선악의 저편>을 낭독하면서 느낀 점은 책의 페이지 자체, 보여지는 편집 방식 자체가 사유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아카넷의 번역을 읽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시각적으로 분산이 일어난다. 또 텍스트를 읽으면서 나오는 각주의 번호가 나오면 살짝이지만 각주에 시선이 간다. 즉 책을 읽으면서 시각적인 이동이 일어나고, 텍스트가 주는 강도나 직관이 아니라 내용/의미 파악에 좀 더 힘을 싣게 된다. 반면에 책세상 번역을 읽을 때는 각주가 전혀 없기 때문에, (몇개의 미주는 있다.) 시각적 이동이 없고 그저 줄을 따라가면서 낭독하게 되고 낭독 자체에 집중할 수 있다.
이건 내용 자체가 인과적인 독해가 요구하는지 아닌지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현재 대부분의 책들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적 독해를 요구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텍스트들은 모두 이런 내용을 가진 책들이라고 볼 수 있다. 신체 감각에서는 시각 중심적인 방식으로 읽게 된다. 시각적으로 읽으면서 이성적인 논리를 읽어내고 거기서 결론을 이끌어낸다. 어떤 면에서 묵독으로 읽는다는 것은 사실은 현재 내가 읽는 텍스트에 신체저적으로는 완전히 집중하지 않는 것을 전제한다. 눈으로는 텍스트를 읽지만 계속해서 이전에 읽었던 텍스트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현재 읽는 것과의 관계성, 인과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이다.
반면 책세상의 번역으로 읽을 때는 각주가 없기 때문에 시각적으로 위아래를 왔다갔다 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조금 더 소리에, 자신의 신체적인 감각에 집중할 수가 있다. 또한 낭독은 오로지 현실에, 현재의 문장에 집중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소리의 강도가 변한다.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거나 이전의 문장들을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낭독하는 소리에 강도가 실리지 않는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책의 형태, 시각적인 편집방식 자체가 우리들의 사고 방식에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각주가 무수히 달린 텍스트들을 낭독으로 읽으면서 낭독의 신체성, 감각적 사유를 경험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각주가 없는 책이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 역시도 아카넷책을 읽으면서 친절한 주석을 읽으면서 니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소리내서 읽는 낭독을 하고자 한다면, 되도록이면 주석이 없는 책을 읽는 것이 좀 더 낭독을 낭독 그 자체로 경험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의 편집 방식 자체가 우리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사실 니체가 계속해서 강조한 스타일(style), 문체에 대한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은 당연히 중요하다. 반시대적인 비판이 제대로 쓰여지는지 중요하고, 전통적인 사고들의 맹점을 분석적으로 고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하지만 니체는 통 안에 있는 내용물을 바꾸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니체는 사유의 정신구조 자체를 바꾸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스타일이 중요하다. 주어진 삶을 풍성하게 우주적으로 살아가려면 문자적인 사고, 표상적인 사고, 재현적인 사고, 이성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이건 어떤 정보를 알게 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강도를 경험해야 하고, 신체적인 반응이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니체는 자신의 책을 이런 방식으로 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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