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류'와 '진리'에 대한 이야기다.
니체는 이전에 우리는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해서 '오류'를 진리로 알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좀 더 이성적이기때문에 진리를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전의 오류, 그리고 지금의 진리라고 말하는 것들은 실은 '알아서는 안 되었던 것들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피부'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한다.
알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진리?
직선적으로 펼쳐져온 이성적 논리와 과학적 세계 전체를 파괴하는 듯한 이야기다. 잠시 자리에 않아서 지금 내가 그렇게 확인하고 싶어하고, 증명하고 싶어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그러면 즉시 내가 추구하는 진리란 다름 아니라 언제 생길지 모르는 불안함과 불확실성을 죽이기 위한 일종의 가면(진리)임을 알 수 있다. (놀랍게도 과학의 시대에서 불확실성 = 불안함 이라는 논리가 널리 퍼져있다.)
라캉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눈은 보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귀는 듣지 않기 위해 생겼다라는 말.
307 비판을 위하여 - 과거에 진리로서 혹은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서 그대가 사랑했던 것이 이제 오류로 나타나면 그대는 그것을 배척하고는 그대의 이성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그대가 다른 사람이었을 그 당시에 - 그대는 항상 다른 사람이다 - 저 오류는 아마도 그대가 지금 생각하는 모든 "진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대에게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당시까지 보아서는 안 되었던 많은 것들을 덮어주고 가려주는 피부와 같은 것이었다. 그대의 이성이 아니라, 그대의 새로운 삶이 당시의 견해를 죽여버린 것이다. ...... 우리가 비판을 할 때 그것은 자의적이거나 비개이적인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살아있는 충동의 힘이 우리 안에 존재하여 껍질을 벗겨낸다는 증거일 때가 매우 자주 있다. 우리는 부정한다. 우리는 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살아서 자신을 긍정하려 하기 때문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283~2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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