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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고고학자 프로이트와 예술가 라캉

by 홍차영차 2025. 8. 14.

 

고고학자 프로이트와 예술가 라캉 -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다 읽고서 든 생각이다.

 

 

프로이트를 이렇게까지(?) 열심히 읽을 생각은 없었다. 프로이트 하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떠올랐고, 어렸을 적의 경험이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한 편협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또한 프로이트가 말하는 어렸을 적 경험이란 거의 100% 성적인 것이기 때문에,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철학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정신분석을 매우 미신적이고 신화적인 분석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라캉을 읽으면서 프로이트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매우 과학적인 체계로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고, 역설적으로 라캉은 정신분석이 과학이 될 수 없다고 여겼던 사람이다. 주이상스, 대상a, 실재계. 큰 사물(das Ding)과 같은 라캉의 용어들은 철학개념이라기보다는 뭔가 '아브라카다브라', '옴마니반메훔'과 같은 주문처럼 느껴졌다. 라캉의 개념어들만 보면 프로이트보다 더 주술적이고 미신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우연히 마주친 라캉은 주로 들뢰즈를 통해서였다. 매몰차게 라캉을 비난하지만 들뢰즈의 철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들뢰즈가 이렇게까지 비판하는 라캉'을 외면할 수 없었다. 또한 니체와 들뢰즈 사이에 내가 잘 모르는 어떤 공간이 있다고 느꼈다.

 

라캉 스스로가 자신을 '프로이트주의자'라고 불렀다.

세미나 형식의 공부를 시작한 1953년부터 라캉은 프로이트의 철학, 특히 초기 저작들을 세밀히 파고들었다. 정신의학계에서 파문당하고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새롭게 세미나를 시작한 1964년 세미나에서도 주된 논의는 바로 프로이트였다. 어떻게 프로이트를 피할 수 있겠는가? 그래 간단히 주된 저작을 읽어보자. '프로이트로 돌아가자' 시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강의>와 <꿈의 해석>을 읽고 나니 라캉이 자신을 '프로이트주의자'라고 부른 것이 이해되었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뿌려놓은 씨앗들을 키워셔 멋진 열매까지 맺은 프로이트주의자가 맞다.

 

프로이트 이전에 정신분석학은 없었다. 의식을 다루었던 심리학은 있었지만 의식을 포함한 더 큰 영역으로서 무의식에 대해서 다루는 학문은 없었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환자를 경험하면서 정신 구조를 과학적으로 파악하기를 시도했다. 우리가 모르는, 아니 의식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근대인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정신의 영역을 주술적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 공간을 과학적 방식으로 체계화를 시도했던 사람! 바로 여기에 프로이트의 위대함이 있다. 남들은 그저 스쳐지나갔던 광대한 대지를 보고 무의식을 발견했다. 아무도 몰라봤던 대지의 형태, 그 속에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유물들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 '무의식'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이 무의식은 현재의 삶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마치 아무도 몰랐던 문명을 발굴해낸 고고학자 같다. 처음으로 무의식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했기 때문에, 프로이트는 고고학자와 같은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의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농담, 실수, 꿈과 같은 것들을 통해서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했다. 실수, 농담, 꿈을 통해서 드러난 무의식은 각자의 어릴적 경험과 인류보편적 경험들을 상정하게 했다. 모호하고 희미하게 조각들 하나하나를 연결시켜서 설득력을 갖도록 해야했다. 조금 거칠게 말해보자면,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발견될수밖에 없는 어떤 '사실'처럼 보인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저작들, 초기의 저작들을 세밀하게 탐구하면서 다른 무의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역설적으로 라캉은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무의식이란 오랫동안 흙속에 묻혀있던 유물이 아니라 예술가가 끊임없는 실험/실패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자신만의 고유성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라캉이 마지막 시기에 실재계를 중요하게 여기게 된 이유다.(고 생각한다.) 라캉의 후기 저작을 언급하게 되면 반복해서 무의식을 공(空)이나 무(無)라고 표현한다. 라캉이 '무의식의 주체'라고 표현하면서도 찰나적으로 무의식과 대면하게 되면 이미 그 무의식은 변해버린다고 말한다. 마치 예술가가 끊임없이 새로운 표현을 하면서 자신을 발견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예술가의 작업은 계속해서 변한다. 피카소의 젊었을 때의 그림은 중년때의 그림과 다르고, 또 노년의 피카소와도 다르다. 그저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세계와 마주치면서 계속해서 자기가 변하기 때문이 아닐까.

 

당연하겠지만 고고학자 프로이트는 잘못되었고, 예술가 라캉이 맞다라는 뜻은 아니다. 라캉이 발견한 무의식 역시 프로이트의 텍스트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간의 정신구조를 탐색한 프로이트의 작업들은 여전히 '인간의 정신 공간과 그 작동메커니즘'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통찰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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