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이 삶의 형식'이라는 말이 와 닿는 아침이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짧은 문장으로 된 경구들이 계속 나왔다. 탄복할만한 문장들이지만 이 문장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몰랐다. 낭독으로 읽다보니 더 그렇다. 경구 자체도 그렇지만 각각의 경구들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맥락을 찾지 못하겠다. 낭독하면서도 여전히 '원인과 결과'를 찾고 있다. 그렇게 돌아가면서 낭독하는 소리를 듣다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를 깨어나게 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울려퍼지는 소리, 그 리듬과 운율이구나!
신체가 법이 새겨지는 서판이라는 말이 몸소 느껴진다. 잠을 자면서 힘을 잃었던 의식이 다시금 전열을 다진다. 낭독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얼굴의 근육들이 기지개를 편다. 컴퓨터가 잠자기 모드에서 업무 모드로 전환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다. 소리를 통해서 전해지는 리듬, 그 운율이다. 현재의 나는 어떤 리듬으로 움직히고 있는건가. 바그너의 음악 아니면 비제?
84 시의 기원 - ...... 운율에는 어떤 강제력이 있다. 그것은 순종하게 하고 동의하게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쾌락을 만들어낸다. 발걸음뿐만 아니라 영혼도 이 박자에 맞춰 움직인다. 사람들은 이렇게 추론했다. 아마 신들의 영혼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운율을 통해 신들에게 강제를 가하고 압력을 가하려 했다. 시를 마법의 밧줄처럼 신들에게 던졌던 것이다. (149~150쪽)
'운율에 강제력'이 있다는 니체의 말! 심지어 사람들은 반복되는 운율을 통해서 신들까지도 강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복되는 운율은 말 그대로 마법이다. 그런데 이 운율은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나를 구성하고, 지금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리듬이다. 자신도 모르게 나를 이끌고 결정하는 무의식. 이 무의식은 일종의 리듬이다!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정신분석의 근본개념으로 무의식, 반복, 충동 전이를 들었다.)
니체는 지난 수백년동안 무시받고 배제되었던 무의식과 비이성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떻게 무의식과 비이성이 다시 작동하게 할 수 있을까? 이성적인 설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바꾼다는 말 자체가 역설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명령으로 덮혀 있는 신체를 바꾸어야 한다. 수많은 법으로 새겨진 신체의 표면을 뒤집어야 한다.
니체가 수많은 경구들을 쓴 이유다. 경구는 시적이면서도 그 안에 내용을 담고 있다. 산만하게 느껴지는 경구와 경구들은 바로 무의식의 움직임처럼 느껴진다. 원래 생각이라는 것은 산만하고 중심이 없으며 하나로 집중되지 않는다. 경구들을 소리내서 낭독할 때 억눌렸던 생각들에 틈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명령들에 겁먹을 필요 없다.
<신과 함께 가라>을 보면 신부들이 새벽에 일어나자마다 함께 성가를 부른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또는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성가'를 부르면서 내 안에 일종의 리듬과 운율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신나는 노래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 바로 이런 것이 니체가 바라는 것일지 모른다.
177 교육 문제에 관하여 - 독일에서는 상류층 사람들을 위한 중요한 교육 수단, 즉 웃음이 결여되어 있다. 독일에서 이들은 웃지 않는다.
179 사상 - 사상은 감각의 그림자다. 사상은 감각보다 항상 더 모호하고, 더 공허하고, 더 단순한다. (226쪽)
183 최선의 미래 음악 - 내게 최고의 음악가는 가장 깊은 행복의 슬픔만을 알고, 그 외의 다른 슬픔은 모르는 음악가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음악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228쪽)
196 우리 청각의 한계 -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듣는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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