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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양심의 가책'의 기원 (feat. 라캉 정신분석)

by 홍차영차 2025. 6. 9.

 

 

나는 양심의 가책을 인간이 일반적으로 경험했던 모든 변화 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저 변화의 압력으로 인해 걸릴 수밖에 없는 심각한 병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변화란 인간이 결국 사회적인 평화의 벽 속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을 때 일어난 변화를 말한다. 육지 동물이 되든가 그렇지 않으면 사멸하든가 할 수밖에 없었던 바다 동물에게 일어났던 것과 꼭 같은 일이 무질서, 전쟁, 방랑, 모험에 잘 적응하고 있던 이 인간이라는 반(半)동물에게 일어난 것이다. 그들의 모든 본능은 단번에 가치를 상실하고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 ...... 이제부터는 발로 걷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운반'해야만 했다. 무서운 무게가 그들 위에 놓이게 되었다. (니체 <도덕의 계보> 144쪽)

 

 

버릴수도 일생동안 짊어질수도 없는, 언제나 어깨 위를 짓누르고 있는 '삶(도덕)의 무게'를 저주하고 싶다면 니체의 텍스트만큼 매혹적인 것도 없다. 하지만 니체는 여기서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 저주'만'하면서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변화 앞에 선 '바다 동물'은 운명을 탓하거나 가혹한 환경을 저주하지 않는다.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갑작스럽게 '모든 본능이 가치를 상실'했지만 이를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뜨겁게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바로 그럴 때에 무겁게만 느껴졌던 '무게'가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했지만 끊임없이 언덕 위로 돌을 굴려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이러한 변화를 껴안는 것은 쉽지 않다. 니체가 진정한 적이자 최고의 친구를 이야기한 이유이다. 삶을 돌아가게 하는 가장 큰 동력이 뭘까. 아마도 복수이지 않을까. 만약 이러한 복수, 원한의 감정으로 스스로를 최고의 상태로 만들수 있다면? 이러한 변화는 저주나 혐오가 아니라 현재의 자신으로 만들어준 은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새로운 미지의 세계 앞에서 그들은 더 이상 이전의 안내인을, 즉 무의식적으로 확실히 안내해주는 통제본능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이 불행한 인간들은 사유, 추리, 계산, 원인과 결과의 결합에 의존하게 되었고, 가장 빈약하고 가장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관인 '의식'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나는 이처럼 비참한 느낌, 이처럼 짓눈리는 듯한 불쾌감이 일찍이 지상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고 믿는다. (니체 <도덕의 계보> 144쪽)

 

 

그렇다고 '본능의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을 축하만 하라는 것도 아니다. 이는 인간의 자기기만, 자만심이라는 함정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니체는 반복해서 근대적 인간들이 자랑하는 이성적 사유, 인과적 사고, 의식에 대해서 비판한다. 심지어 의식에 대해서는 가장 늦게 생겨서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그래서 "가장 빈약하고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관"이라고까지 말한다. 우선 의식에 대한 니체의 비판이 무엇인지 새겨봐야 한다. 바로 이 순간이 최고의 적이, 진정한 최고의 친구가 되는 순간이다. 복수가 최고의 힘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저 오래된 본능이 통상적으로 요구하던 것을 갑자기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요구에 따르는 것이 어려웠고, 거의 불가능했을 뿐이다. 대체로 이 본능들은 새로운, 말하자면 지하적인(은밀한) 만족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밖으로 발산되지 못한 모든 본능은 내면을 향하게 된다. 이것이 내가 인간의 내면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나중에 '영혼'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 인간에게서 자라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두 개의 피부막 사이에 펼쳐진 것처럼 얇았던 내면세계 전체가 본능이 밖으로 발산되는 것이 저지됨에 따라 더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갖게 되었다. 오래된 자유의 본능에 대해 국가조직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구축한 저 무서운 방어벽은 - 무엇보다도 형벌도 이러한 방어벽 중의 하나이다 - 거칠고 자유롭고 방황하는 인간의 저 모든 본능을 거꾸로 돌려서 인간 자신을 향하게 만들었다. ...... 이것이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 이와 함께 인류가 오늘까지도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크고 무서운 병도 생긴 것이다. 이러한 병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하는 병이다. (니체 <도덕의 계보> 145쪽)

 

 

<도덕의 계보> 두번째 논문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16번째 글 전체는 현대의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의 원류를 보여주는 듯 하다. 통상적으로 작동하던 본능이 이제 작동하기 어려워져서 "지하적인(은밀한)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구절은 라캉이 신경증자를 묘사하는 부분과 일치한다. 라캉식으로 보자면 현대인들은 대개 '신경증자'라고 할 수 있는데, "신경증자의 신체는 기표로 덧쓰여져 있는 죽은 신체"다. 생물학적 메커니즘으로 보면 신경증자(현대인)의 신체는 사회화를 통해서 길들여져있다. 결과적으로 코드화된 신체에서는 (억압으로 인해서) 본능이 거의 작동하지 않으며, '본능'을 경험할 수 있는 부분이 신체에서도 국소영역(성감대)에 숨어들게 된다.

"발산되지 못한 모든 본능이 내면을 향하게 된다"라는 말에서는 정신분석의 기본 기제인 '무의식=억압'을 떠올리게 되고, "얇았던 내면세계가 ... 분화되고 팽창되어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갖게 되었다는 말에서는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기본적인 불안이 어디서 왔는가를 좀 더 직접적으로 알게 된다.

 

'양심의 가책'에 대한 기원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정신분석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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