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학에서 어머니와 아버지
일단 정신분석학에서 쓰는 어머니, 아버지는 생물학적인 부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초의 대타자는 어머니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어머니'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아이를 보살피는 양육자'를 가리킨다. 실제로는 아버지가 될 수 도 있고, 보육시설의 원장님, 누나나 형이 될 수도 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에서 아버지는 '법'을 주관하고 주체를 거세하는 것을 뜻한다.
욕구, 요구 그리고 욕망
아이가 태어나서 만나는 '최초의 대타자는 어머니'라고 말했는데, 어머니가 대타자가 되는 것은 자신의 생존여탈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생물학적으로 살기 위한 필수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 먹고, 마시고, 자고 배설하는 기본적인 욕구. 그런데 어린아기는 대타자가 없으면 먹을수도 배설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신의 욕구를 대타자에게 잘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것 뿐이다. 아직 언어를 모르는 아이는 비언어적으로 욕구를 울음으로 전달하게 되고, 어머니는 이 욕구를 '먹고싶구나' 혹은 '쉬를 하고 싶구나'라는 요구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이미 언어의 세계(상징계)에 있으므로 욕구가 언어화되지 않으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구와 요구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상징계와 현실계 사이의 간극이라고 봐야 한다. 욕구는 생물학적인 것으로 현실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요구는 언어적이며 상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간극은 명확하게 문자로 인한 충동과 언어 사이의 간극처럼 보임)
아이가 우는 것은 먹고 싶은 것일수도 자고 싶은 것일수도 있지만 점차적으로는 어머니가 자신 옆에 계속 있어주기를 원하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아이는 욕구를 떠나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요구를 하게 됩니다. 대타자인 어머니가 자꾸 사라지는데 아이는 이를 이해할 수 없기때문에 불안해 하고, 결국에는 대타자인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요구하게 된다. 바로 여기에서 '욕망'이 생깁니다. 욕망은 현실계와 상징계 사이의 간극에서 나오고, 욕망은 항상 '다른 것'을 욕망하게 된다.
대타자의 대타자
최초의 대타자는 어머니라고 했는데, 왜 어머니는 '법'을 가져오는 대타자의 역할을 하지 못할까? 왜냐하면 아이는 상상적으로 해석하는 반면에 어머니는 상징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최초의 대타자와의 만남에서 아이는 법의 존재를 모르면서 대타자의 요구를 만족시키려할 뿐이다. 즉 아이가 '법'의 존재를 알고 '법' 안에서 살아가려면 '법'을 담당하는 존재 - '아버지의 이름'이라는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대타자의 대타자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이름'이야말로 대타자로서 '법'을 부여하고 주관하는 존재로 작동하게 된다. (*사실 대타자의 대타자라는 것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름'은 어머니의 말에서만 작동한다. 아이에게 "이렇게 하면 아버지(법)가 좋아하지 않을꺼야."라는 말할 때에. '아버지의 이름'이란 세계의 질서이고, 상징적 아버지는 "법을 보증해주는 존재"로 설정된 것이다. 그런데 라캉은 "아버지가 기능하려면 실체가 있으면 안되고, 죽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완벽하게 초월적 존재, 초월적 법, 세계의 질서로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초월적 질서(보증)라고 생각한 존재가 실수하고 힘도 약하게 되면 어떻게 할까. 자아를 구성했던 기둥이 무너지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3단계
프로이트에게 오이디푸스콤플렉스는 "모자 관계에 아버지가 개입함으로써 아이가 품게 되는 사랑이나 증오라는 관념의 복합체complex"이다. 오이디푸스 1단계는 "욕구불만"인 단계로,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에게 생사여탈권이 맡겨져 있는 박탈의 상황이다. 前 오이디푸스기라고 말할 수 있다. 2단계는 아버지가 모자 관계에 개입하면서 아이는 어머니를 빼앗아가는 박탈자로서 상상적 아버지를 느낀다. 2단계에서 어머지의 현전과 부재를 통제하는 원인으로 아버지의 존재를 인식한다. 2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적대감을 갖게 된다.
오이디푸스 3단계는 아이가 아버지를 상징적 아버지로 이해하고, 그 '법'을 받아들이는 단계이다. 여기에서 오이디푸스적 적의는 사라진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나에게서 어머니를 빼앗는 존재가 아니라, 법을 베풀어주는 존재로 변하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해소되는 단계이다. 바로 여기에서 거세라는 개념이 나온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가 해소되는 조건이 바로 거세이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는 '자신에게 성기가 있는데', 여자아이가 페니스를 가지고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서 누군가 그것을 가져갔다고 가정한다. 또한 남자아이는 자신도 빼앗길지 모른다는 거세 불안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어머니를 빼앗는 연적"이라기보다 자신을 "거세시킬 수 있는 위협"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연적으로 여기는 오이디푸스적 적의를 철회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할 수 없다"라는 생각에서 "어머니와 근친상간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식으로 사고방식이 바뀐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 해소의 단계란 아이가 거세불안으로 성적인 정상화를 수행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오이디푸스 3단계 - 아버지의 이름에서 팔루스로
프로이트의 거세 이론이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면 라캉은 좀 더 논리적이고 구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페니스가 생물학적인 남성성기를 지칭한다면, 팔루스는 문화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의미이다. 팔루스는 라캉의 독자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거세라는 개념도 상당히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된다.
오이디푸스 1단계 : 욕망의 대상(팔루스)가 되려는 시기. 아직 아버지(법)의 존재를 모르는 시기
거울단계 고찰 :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려고 하는데, 여기에서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란 '팔루스'이다. 그런데 주체가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주체에게 뭔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루스의 결여. 결국 팔루스는 어머니의 결여(=욕망의 대상) 그 자체를 나타내는 말이다. 아이 입장에서 내가 그 '결핍'이 되어버리면 어머니가 언제나 자신 옆에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아이가 바라는 것은 대타자(어머니)의 결핍을 메우는 일이 된다.
거울단계 재고찰 : 아이는 어머니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켜 팔루스의 결여를 메우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어머니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거울 단계가 온다는 점이다. 대타자가 아이에게 요구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것은 거울상과 똑같은 효과를 갖는다. 결국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면서 아이는 '자아'를 갖게 되는데, 이렇게 생겨난 자아는 '대타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탄생한 자아가 된다.
오이디푸스 2단계 :
오이디푸스 2단계는 어머니에게 팔루스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의식하는 단계다. 아이는 상상적 아버지가 어머니의 팔루스를 박탈했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에게도 팔루스가 있었다"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아이와 아버지 사이에는 상상적인 경쟁관계가 만들어지게 되고, 아버지에게 적의를 드러낸다.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오이디푸스 2단계에 머문채 상상적 아버지를 향한 적의를 그대로 가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오이디푸스 3단계 : 아버지를 상징적 아버지로 이해하고 그 법을 받아들이는 단계다. 아이는 팔루스가 되려는 것을 포기하고, "팔루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아버지와 동일화해버린다. 2단계에서 3단계로 이행하는 이유는 아이가 아버지처럼 팔루스를 가지고 싶다는 이상을 품게 하고,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화함으로써 '법'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아이가 팔루스를 가지려고 할 경우, 어머니의 욕망에서 해방되어 좀 더 넓은 대상으로 나아간다는 점이다.
--> 3단계는 상징계의 '법'을 수용하는 단계이므로 오이디푸스콤플렉스란 주체가 상상적 함정에서 벗어나 상징계에서 삶을 안정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이름과 팔루스는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구성하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다.
* 가타오카 이치타케의 책으로 간단하게는 정리가 되는데 향후 아래의 책을 참고해서 라캉의 오이디푸스 단계를 좀 더 세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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