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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읽기

본능 대신 무의식

by 홍차영차 2024. 11. 18.

 

본능과 무의식

가타오카 이치타케는 '무의식의 기원'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에게는 본능 대신 무의식이 주어져 있다"라고 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인간이란 본능이 망가진 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본능 대신 무의식'이 주어질 수 있는 조건이란 뭘까? 바로 언어다.

갓태어난 송아지, 말, 사슴들은 대부분 30분이나 1시간정도면 바로 일어서서 뛰어다닌다. 그들에게는 '본능'을 가지고 자연과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뭔가가 새겨져 있어서, 이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인간은 이렇게 살수가 없다. 즉 "인간은 자연에 비해 근본적으로 과잉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라캉은 이 과잉된 것은 '언어'라고 생각했다.

앞선 장에서도 언어를 구성하는 시니피앙은 물리 세계와 전혀 다른 언어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했다. 즉, 1차적으로 시니피앙의 의미란 시니피에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1차적 의미란 상상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사과'라는 시니피앙을 말하면서 '주먹정도 크기를 가진 빨간 모양의 동글한 모양'을 떠오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와 전혀 다른 의미작용을 하게 된다. 시니피앙은 상상적 이미지를 넘어서 다른 시니피앙과 연결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과를 먹으면서 체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는 사과는 곧바로 고통이란 시니피앙과 의미를 생성하게 되는 것. 상상적 이미지 이외의 이러한 의미작용이 일어나는 것은 언어때문이고, 이러한 언어를 갖는 인간에게만 무의식이 나타나므로, '무의식이란 언어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처럼 무의식은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혼돈과 무질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언어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것은 나름의 규칙이 작동하고 있다는 점. 그래서 일차적으로 정신분석의 목표는 이미지의 배후에서 작동하고 있는 무의식의 법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분석의 현장에서 언어의 (상상적인)의미의 사용을 중단하고, 시니피앙적인 언어의 성질을 드러내는 것이 필수적이다.

 

*뇌과학은 본능과 무의식에 대한 부분은 뉴런의 연결상태로 설명한다. 실제로 갓태어난 동물들의 뇌를 스캔해보면 뉴런들간 강한 계열들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발견된다. 반대로 갓태어난 아이의 뇌에서는 뉴런들이 있지만 전기/화학적인 길(계열)이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이후에 어떤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 뉴런들의 계열들이 다르게 형성되기 때문에 똑같이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질 수 있다. 역설적으로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뛰고 먹고 피할 수 있지만 뉴런들의 계열이 태어날 때 이미 연결되어 있기때문에 변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 놀랍게도 뇌과학적 설명과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본능과 무의식에 대한 메커니즘이 상당히 비슷하다. (데이비드 이글먼 <더 브레인>,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L도식 - 주체S / 타자a' / 자아a / 대타자A

자아는 거울단계를 통과하면서 형성되는데, 타자를 통해서 파악되는 자신의 이미지(거울상)이 없다면 자아는 형성되지 않다. 그런데 거울단계는 자아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근본적인 부조화를 만들어낸다. 왜냐하면 자아란 '대상화된 자신'이기 때문에 이 자아의 모습은 자기애(사랑)를 일으키기도 하면서 경멸과 함께 증오가 생긴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사랑과 증오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대타자(어머니)의 대타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법'을 가져오는 존재로서의 대타자 - 아버지의 이름으로! 일반적인 타자가 '상상적인 존재'라면 대타자는 '상징적인 것'이다. 대타자인 아버지에게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은유를 쓰는데, 여기서 아버지란 친부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에게 초월적인 법을 작동하게 만드는 구조/체계를 말한다. (*이 부조화가 문자를 갖게 되면서 형성된 속마음과 행동간의 간극과 일치하는가?)

 

지금까지 말한 부조화를 표현한 것이 바로 라캉의 L도식이다. 처음 보면 이게 뭔가 하지만 점점 이 도식 자체로 주체와 자아에 대한 부조화를 쉽게 이해하게 된다. 우선 라캉의 주체는 일반적인 혹은 이성적인 주체가 아니라 무의식적 주체다. 무의식적 주체(S)라고 명명했지만 실체도 없고 항상 변하고 있으므로 내가 마주친 주체는 생성되는 즉시 달라진다고 봐야한다. 

이 도식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무의식적 주체(이후 주체)는 자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주체와 자아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자아는 타자(의 이미지)를 통해서 구성됩니다. 도식에서 보면 S-a'-a 로 연결되는 것이 거울 단계이다. 실제 거울의 이미지처럼 타자에게 비춰진 혹은 타자가 기대하는 이미지로 자아는 형성된다. 중요한 것은 자아의 구성은 타자만이 아니라 대타자의 법에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타자 혹은 대타자 어디에 더 큰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자아의 모습이 달라질 것. 이런 방식으로 자아가 형성되기 때문에 주체와 자아 사이의 간극, 부조화를 인지하는게 중요하다.

 

- 이미지가 지배하는 거울 단계 : 상상계

- '법'이 작동하는 언어의 세계 : 상징계

 

무의식의 형성물

정신분석이 뭔지 라캉이 누구인지 몰라도 다들 알고 있는 것은 꿈은 무의식의 형성물이라는 점이다. 꿈이란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을 반영해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 그래서 정신분석학자를 찾지 않더라도 가까운 친구, 사제나 무당, 심리학자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이 꿈을 해석하려고 시도한다. 그런데 라캉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꿈의 해석이 아니라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 억악된 무의식'이 '무의식의 형성물'인 꿈을 통해서 다시 드러나게 되었는가라고 말한다.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은 억압된 것이다. 강렬한 성적 욕망이라든가 폭력적 행위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더 쉽게, 어떤 대상(사람/사물)을 만나면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충동들이나 욕구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못하면서) 억압된 것들이 바로 무의식이다. 그런데 "편지(시니피앙)는 어떻게든 수신처에 도착한다"라는 말처럼, 억압된 시니피앙은 무의식에 그대로 있지 않는다. 모습을 변형시켜서라도 의식의 세계에 표현된다. 다양한 실착행위로든 신체적 증상으로든, 아니면 전혀 다른 시니피앙의 모습을 띠고서라도. 즉, 억압된 시니피앙은 '무의식의 어떤 과정'을 거쳐서 자신도 모르게 회귀한다. 이런 것들을 '무의식의 형성물'이라고 부르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꿈이다. 프로이트는 꿈이란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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