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문학, 철학 강의에서 그리고 세미나를 하면서 여러번 현재 예술은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왜 예술을 생존욕구라고 말할까"라는 짧은 글을 쓴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의 정신분석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정신분석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예술'과 상당히 닮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최근 2~3년 이내에 함께 세미나를 했거나 강의를 들었던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의 관심사는 '문자와 정신공간'입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도, 스탕달의 <적과흑>을 볼 때도,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을 공부할 때도, 심지어는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을 때도 '문자와 정신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가 없었던 구술성의 시대와 달라 문자의 발명과 함께 현재 자아라고 하는 자기인식, 정신의 발명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놀라운 점은 우리가 이 사실을 모르고, 원래부터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자기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말은 자기 스스로가 '대상화된 자기'를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르게 표현해보자면, 내 속에 내면성이 생겼다는 점이고 이런 속마음과 행동, 내면의 충동과 말 사이에 간극이 발생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강의를 하거나 세미나를 하면서 자아와 자기 사이의 간극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이런 간극을 해소할 자기만의 기술, 일상의 습(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예술이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단순 취미가 아니라 생존에 필수적인 욕구가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내면의 충동들, 무의식적인 욕구들은 어느정도 제어될 수 있습니다. 이점이 바로 이성의 강력한 힘이자 장점이죠. 하지만 이러한 충동들을 이성으로 무조건 누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억압된 충동들은 해소되지 않는다면 나중에 반드시 폭발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지랄총량의 법칙이랄까 라캉식으로는 "편지는 반드시 수신처에 도착한다"고 할까.
사물이나 사람, 사건에 대해서 자신에게 도달한 비언어적인 감응들을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면 다른 방식으로 무의식의 틈을 비집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비언어적인 감응들을 비언어적으로 표현해내는 것입니다. (문자 그 자체는 의식과 마찬가지고 배제성을 갖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또한 이점이 바로 문학가들의 고민!) 그리고 문자성의 시대가 되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몸체성, 다성적인 능력들이 쇠퇴했기 때문에 반대로 문자성이 최고조로 올라간 현재에는 '예술'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무의식적 충동을 표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에 파괴, 해체, 죽음, 폭력을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도 문제적. 예를 들어 닭고기를 얻을 때의 폭력성, 나무를 벨 때의 파괴와 같은 것들. 굿판이 없어진 것도. 무당굿과 국악예술 참조)
놀라운 점은,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의 과정이 지금 이야기한 문자와 정신공간에 대한 이야기와 아주 흡사하다는 점입니다. 라캉의 정신분석은 결국 '무의식적 주체'를 긍정하면서 자신의 증상을 바라보면서 '억압된 무의식'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증상은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라캉에게 주체는 항상 무의식적 주체)를 알아가는 값진 질료가 되는 거죠. 라캉이 보기에 이 과정은 예술가가 자기 스타일, 작품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라캉 스스로도 예술(특히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이후에도 라캉의 정신분석은 미술작품을 비롯하여 예술, 문화, 사회, 정치, 종교를 해석하는 아주 좋은 틀이 이용되고 있죠. (하지만 대부분의 현대예술들은 흉내내기에 불과하거나 예술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문자적이라는 아이러니. 예술 - '문자'에 갖힌 이미지의 해방 참조)
정신분석은 정신병을 가진 특수한 사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정신분석은 현재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라캉이 강조하듯이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분석의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술가가 작품을 만드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스승의 화풍을 따라해서는 안됩니다. 일정 정도는 스승의 언어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술이란 자기 자신과의 만남, 무의식적 주체로서 자기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 언어를 발견해내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이전의 언어를 잃어버리는 일이 되어야 하고, 침묵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보면 볼수록 흥미롭네요. 라캉의 정신분석은 정말 아주 현재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내년에 같이 공부해봐요. ^^;
라캉, 정신분석, 예술, 문자, 정신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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