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정신분석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정신분석에는 건강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말이다. 당연히 치료도 없다. 그렇다면 정신분석에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증상'을 살펴보지만 증상은 제거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할 재료일 뿐이다. 증상의 원인을 파악하게 되면 증상이 사라질수도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신분석은 뭔가 잘못된 것을 밝혀서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는 방식' 자체를 살펴보는 학문이다.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다룬다. '사는 방식'을 다룬다고 하면서 왜 '무의식'을 다룰까? 의식적인 생각과 행동에 더 집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의식이나 자아라는 것은 자신의 특이성과 상관없이 형성된 왜곡이기 때문이다. 흔히 이야기하듯 의식은 타자가 형성해놓은 법칙(구조)에 자신을 적응시키면서 만들어진 일종의 가면이라고 봐야한다. 의식적인 행동과 사고를 통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건 잘 맞지 않는 옷일 가능성이 높다. 나한테 잘 맞는 크기, 스타일의 옷을 찾아야 한다. 없다면 만들어야 할수도.
무의식이란 "자기 안에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간단히 정의했지만, 사실 굉장히 놀라운 정의다. 정신분석은 이렇게 가정한다. 내 안에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나를 움직히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 나는 내 의지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신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힘과 동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의 대상은 '무의식'이 된다. 조금 더 살펴보자면, 무의식은 '알지 못하는 것'이기보다는 '자기가 알고 싶지 않고, 모르는체 지내고 싶은 것', 한 마디로 무의식은 '억압된 것'이다.
정신분석이 '사는 방식'을 다룬다고 했을때 바로 이 지점에서 간극이 생긴다. 실제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주로 의식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고, 가족이 원하고, 사회가 원하고, 국가가 원한 방식으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는데, 이건 나의 무의식과 조응하는 삶이 아니다. 자신(의 무의식)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사는 방식을 고안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문자와 정신공간을 떠올려보면 좀 더 쉽게 이해된다. 문자의 발명으로 함께 나타난 내면성. 내면성과 행동의 간극!)
그런데 정신분석학적으로 보면 현재의 인간들은 모두 일종의 병적인 삶의 방식을 갖고 있다. 신경증, 분열증(정신병), 도착증(+자폐증). 모든 사람들은 이 세 가지 분류중에 하나에 속한다. 내가 이런 병증을 갖고 있다고 놀랄 필요는 없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은 건강보다는 '광기'가 더 근본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납득하는 '사는방식(윤리)'를 발견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정신분석이 '특이성'에 집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성의 세계에는 언제나 '특이성'이 결여되어 있다. 일반성의 세계에 있으면서 느끼는 불편함에 주목해야 한다. 이럴때 증상은 불행과 고통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다.
1~3장에서 나온 몇 가지 개념을 정리해보자.
일단 라캉의 정신분석에서 주체와 자아는 다르다. 앞서 말했듯이 자아란 보통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인데, 이는 객체화된, 대상화된 자신이다. 쉽게 말해서 '타자'에 의해 부여받은 이미지에 의해 구축된 모습, 일종의 왜곡이다. 반면에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체란 항상 무의식의 주체, 무의식적 주체를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자아가 아니라 무의식적 주체를 다룬다. 더 놀라운 점은 주체는 실체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말로도 이야기될 수 없다. 주체는 있지만 실제로는 마주칠 수 없다. 주체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주체는 바로 사라지고 변화한다.
이와 함께 라캉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상상계, 상징계, 현실계(실재계)이다. 이에 대해서는 함께 공부해가면서 각자 자신의 언어로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간단히 정리해보면, 상상계(the imaginary)는 한 마디로 이미지의 영역이다. 이미지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신체다. 자신의 육체를 거울로 확인하면서 통일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계기를 거울 단계라고 하고 이때 육체는 통일적인 신체로 파악된다. 두번째로 상징계(the symbolic)는 언어의 영역이고, 언어구조의 영역이다. 헷갈리자 말하야 할 것은 상징계란, 언어의 (상상적, 이미지적) 의미가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내는 구조/기능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현실계(실재계, the real)이 있다. 향후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오겠지만 현실계는 상징적인 것으로는 말해질 수 없는 영역, 불가능으로서의 영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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