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을 산책한다.
계속 걷다보면 어느 순간 나무가 말을 걸어온다.
나무가 전하는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면 불안은 사라지고
근심걱정의 무게도 줄어든다.
나무와 이야기를 나누는 이러한 정신공간은 지금 인정되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어주는 척하면서 센치하다고 말할뿐이다. 조금 더 진진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정신과에 가볼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오로지 인간만이 생각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만이 정신적인 것을 가졌다고 말하는 순간 삶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타자(사물)과의 관계 역시 더 어려워진다. 우리는 이제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도 시선을 느낀다. 책장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고, 기하학적 무늬의 벽이 나를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건 그냥 벽일 뿐이야!"라고 아무리 외쳐도 불안을 막을수는 없다. 또한 가려져 있는 옷장이나 보이지 않는 문 뒤편은 어딘가로 통하는 마법의 문이 아니라 누군가 있을수도 있는 공포의 공간이 된다.
지금 우리는 고대인처럼 모든 것들 속에서 시선을 느낀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불안이 생긴다. 이러한 불안은 사물들이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방식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만이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정신을 사물에 투영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의식의 자폐적인 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모든 사물들이 의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
나무와도 대화할 수 있고, 자동차, 책상과도 좀 더 편안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혹여 벽이 말을 걸어도 내 정신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사물과 다르지 않으며 나와 사물들 사이에 어떤 장애물도 없다.
정신, 이성, 언어를 인간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세계를 점점 더 축소시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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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정신에 대한 긍지
동물에서 인간이 유래했다는 설에 저항하면서 자연과 인간 사이에 커다란 거리를 두려는 인간의 긍지, - 이 긍지는 정신의 본질에 대한 편견을 근거한다. 이러한 편견은 비교적 새로운 것이다. 인류의 긴 선사 시대에 사람들은 정신이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인간의 특권으로 존중하려 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을 (모든 충동, 악의, 경향과 함께) [다른 생물체들과의 ] 공유 재산으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정신적인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동물이나 나무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정신을 통해 우리가 자연과 분리되지 않고 자연과 결합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겸손하게 자신을 훈육했다. 이것 역시 편견의 결과다. (니체 <아침놀>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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