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낭독 8주차 23번째 시간에 <우상의 황혼>을 다 읽었다.
1월22일에 처음 낭독하기 시작했으니 두 달이 안 되어 낭독으로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일주일에 3일씩 매주 월, 화, 수 새벽에 한 시간씩 읽는 방식인데 낭독으로 생각보다 많은 양의 책을 읽었다. 신기하다.
이번에는 니체의 <우상의 황혼>을 읽었는데 <차라투스트라>를 읽었을 때와는 읽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우선 <우상의 황혼>은 형식면에서 시적인 느낌이나 경구(警句)적인 문체가 아니다. 소리내서 읽는 것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차라투스트라> 역시 단순히 읽는 것만으로 읽기 어렵다. 다만 <차라투스트라>는 시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어서 소리 내서 읽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고양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우상의 황혼>은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는 전해지는 바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우상의 황혼>은 전형적인 인과적 독해를 요구한다.
문장과 문장은 주로 '원인과 결과'식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전후의 문장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읽어야 한다. 단어나 문장이 주는 감응이 아니라 내용과 정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차라투스트라>에 이어서 읽어보니 확실히 <우상의 황혼>은 묵독이 더 어울리는 책이었다. 한 마디로 <우상의 황혼>이 이성적인 사유방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훨씬 더 잘 이해된다. <차라투스트라>가 미로에 빠진 느낌이라면 <우상의 황혼>은 일반적인 건물처럼 읽힌다.
묵독이 더 어울리다고 느낀 더 큰 이유는 책의 편집과 읽는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전에 읽었던 <차라투스트라>는 책세상 번역이고, 그 번역에는 각주가 없었다. 이해가 되지 않을지 몰라도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때는 오로지 본문을 읽는 것에만 집중했다. 해설도 있기는 하지만 간단한 배경설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우상의 황혼>에는 무수히 많은 각주가 각각의 페이지 밑에 달려 있다. 이 책에는 같은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각주를 읽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반면에 각주를 읽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책을 읽다보니 문장이나 단어 자체가 주는 감응을 느끼기 힘들다. 각주가 있어서 문장을 정보 전달이나 논리적 인과성으로 이해하기에는 좋았지만 책 자체가 주는 감응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차라투스트라>와 <우상의 황혼>을 연속해서 읽어보니 확실히 낭독과 묵독의 사고가 다르다.
소리내서 읽는 낭독은 아주 신체적이고, 이성적 사유와 다르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묵독과 낭독의 사고 다른지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차라투스트라>를 직접 읽어보면 알겠지만 단순하게 소리 내서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몸 전체에 차오른다. 힘든 산행 끝에 올라간 정상에서 느끼는 기분이랄까. 몸에 활력이 생기고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뭔가를 하고자 하는 욕망이 올라온다. 니체가 반복해서 데카당적이라고, "책들 사이에 끼어서 말라버린 벌레"와 같다고 비판했던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기분이 든다.
낭독은 단순하게 소리 내서 읽기 때문에 몸이 깨어난다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성적 사고, 의식적 사고와 다른 사고 방식이 어떤 것인지 실감할 수 있다. 들뢰즈식으로 보면 사유의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다. 다른 사유의 이미지가 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상상의 경계까 허물어지는 작용이다. 상상의 내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전혀 수용할 수 없었던 다른 삶으로의 도전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나는 그리스인의 가장 강렬한 본능인 힘에의 의지를 보았으며, 그들이 이러한 충동이 갖는 제어하기 어려운 강력한 힘 앞에서 몸을 떠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들의 모든 제도가 그들 자신이 내부에 품고 있는 폭발물에 대해 서로 안전하게 몸을 지키기 위한 보호조치로부터 자라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서 내부의 엄청난 긴장은 가공할 만하고 무자비한 적의로 변하면서 외부를 향해 폭발했다. 도시 국가들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는 전쟁을 벌였던 것은 자신의 시민들에게 평안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사람들은 감해질 필요가 있었다. 위험은 가까이에 있었으며 도처에 잠복해 있었다. 유연하기 그지없는 멋진 신체, 그리스인에게 특유한 대담한 현실주의와 비도덕주의는 필요에서 생긴 것이었지 그들의 '본성'이 아니었다.
니체 <우상의 황혼> 아카넷 171쪽
신체적 사유, 몸의 사유란 무의식과 연결된다. 개인적으로 낭독은 무의식적 주체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술이라고 본다. 의식의 세계, 이성의 세계, 문자의 세계로 꺼내는 순간 왜곡될 수밖에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낭독으로 경험하면서 다른 주체로의 물꼬를 틀 수 있다. 조금 이상하게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형상화할 수 없는 무의식적 주체가 의식의 표면을 뚫고 나와서 산화되는 과정이야말로 역동적이고 건강한 삶을 만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즉 낭독이나 다른 방식으로 느꼈던 형상화할 수 없는 감응들을 문자와 말로 표현하는 산화과정을 거쳐갈 때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
<우상의 황혼>이 묵독에 어울린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모든 책을 낭독으로 읽는 장점은 남아 있다.
아마도 수학책도 소리내서 읽을 때 더 잘 이해될수도 있다. 낭독은 이성적 사유를 포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내서 읽으면서 신체적 감각을 깨우고, 사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 그리고 낭독은 동시에 의식적이며 논리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인과적 독해도 가능하다.
가능할까, 누가 새벽에 일어나서 책읽기를, 그것도 니체를 낭독으로 읽자고 할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호응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기쁘다. 올해 꾸준히 낭독을 하면서 다른 사유의 이미지를 실천해보고 싶다. 새벽에 진행하는 세미나도 해보면 재미날듯.
가장 먼저 설득시켜야 하는 것은 신체다. 중요하고 선택된 품행을 엄격하게 견지하는 것, '자신을 되는대로 방치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키는 것, 이것들만으로 중요하고 선택도니 인물이 되기에 완전히 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두세 세대만 지나면 모든 것은 이미 내면화된되어 버린다. 민족과 인류의 운명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것은 도야(문화)를 올바른 장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영혼'에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장소는 신체 / 품행 / 섭생법 / 생리학이며, 나머지는 그것으로부터 저절로 따라 나오는 것이다. ... 이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역사상 최고의 문화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 그들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행했다. 신체를 경멸했던 그리스도교는 이제까지 인류 최대의 불행이었다.
니체 <우상의 황혼> 아카넷 1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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