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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낭독은 고된 육체적 노동

by 홍차영차 2024. 3. 27.

 

 

새벽낭독 3개월차. 미라클모닝을 원한 것은 아지만 이제 제법 새벽6시 기상이 몸에 익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계절이 바뀌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새벽낭독을 처음 할 때는 매일 매일이 고역이었다. 일어나서도 한동안은 비몽사몽. 3번째 책(<즐거운 학문>)을 읽을 때쯤 되니 확실히 몸이 적응하는 것 같다. 잠이 드는 시간은 여전히 들쭉날쭉이지만 점점 더 자연스럽게 12시 전에 잠자리에 들고, 6시쯤이면 몸이 반응한다.

이번에는 단 두명이서 읽다보니 각자가 낭독하는 양이 좀 많아졌다. 새벽낭독을 하면서 처음으로 목이 아프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다. 많은 책에서 소리내서 읽는 낭독을 '고된 육체적 노동'으로 묘사한다. 눈으로만 책을 읽는 현대인들에게는 낯선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책읽기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소리내서 읽는 낭독이 좋은 이유다.

묵독은 눈만 사용한다. 낭독은 신체 전체를 사용한다. 눈으로 책을 보고 신체를 통해 소리를 만들어내고, 다시 그 소리는 내 신체와 청각을 자극한다. 낭독이 신체적 읽기인 이유다. 낭독이 좋다는 것은 단순히 신체의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점을 넘어선다. 낭독을 하면 평소 잘 사용하지 않던 감각들이 깨어난다. 촉각, 청각, 시각, 미각, 후각까지. 문자적 세계에서 점점 메말라가던 감각들이 살아난다. 건조하게 책을 보던 것과 다르게 문자와 세계와의 간극이 사라진다. 문자를 읽지만 그 속에서 세계를 만난다.

시각 중심적으로만 세계를 접하게 세계 그 자체가 주는 풍부함을 감각하기 어렵다. 눈으로만 감각하는 세계는 본질적이며 재현적이기 때문이다.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사물 자체가 주는 충만함을 맛 봐야 한다. 낭독을 하면서 깨어난 감각들로 내가 보는 세계는 어제와 달라진다. 인식의 방법이 시각에서 오감 전체로 넗어지기 때문이다. 감각들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새로운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아직 읽을 양이 많으니 목이 아프지 않게 복식호흡으로, 온 몸으로 낭독하는 것도 연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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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다리를 건너

자신의 감정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과 교제하는 경우, 우리는 자신을 위장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 사람들은 애정이 담긴 감정이나 열광적이고 고조된 감정을 들키면 그것을 알아챈 사람이 마치 그들의 비밀을 들여다보기나 한 것처럼 그 사람에 대한 증오를 느낀다. 그런 순간에 그들에게 선의를 베풀려면, 그들을 웃게 만들거나 차갑고 짓궂은 농담을 건네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그들의 감정이 다시 얼어붙어 그들은 자신에 대한 지배력을 회복하게 된다. 88쪽

19 - 악

최고의 생산적인 인간과민족들의 삶을 조사하면서 이렇게 자문해보라. 나무가 악천후나 폭풍을 겪지 않고 자랑스럽게 하늘 높이 자라날 수 있겠는가? 외부에서 가해지는 불운이나 역경, 증오, 질투, 고집, 불신, 냉혹, 탐욕, 폭력 등은 이것들이 아니라면 덕의 위대한 성장이 불가능한 유익한 환경에 속하는 것이 아닐까? 나약한 천성을 지닌 자를 멸망케 하는 독은 강한 자를 강화시킨다. 이때 강한 자는 이를 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90쪽

21 - 사심 없기를 가르치는 설교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사람의 덕을 선하다고 부를 때, 이는 그것이 그 사람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91쪽

… 따라서 덕이 칭송되는 경우 여기에서 원래 칭송되는 것은 덕의 도구적 본성이며, 또한 모든 덕에 내재되어 있는 저 맹목적 충동, 개인의 이득에 의해 결코 제어되지 않는 충동인 것이다. 한마디로 덕에는 비이성적인 것이 있으며 이를 통해 개인을 전체를 위한 기능으로 탈바꿈시킨다. 덕을 칭송하는 것은 그 개인에게 해로운 어떤 것을 칭송하는 것이고, 인간에게서 가장 고귀한 자기애와 자신을 지키는 최상의 능력을 빼앗아가는 충동들을 칭송하는 것이다. 92

… 사심 없고, 희생적이고, 유덕한 사람, 다시 말해 그의 모든 힘과 이성을 자신의 보본, 발전, 고양, 촉진, 권력 신장에 사용하지 않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양보하고 생각 없이, 심지어 냉담하고 냉소적으로 사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 - 아무큰 이것은 사심 없는 정신에서 생겨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웃”이 사심 없는 사람을 칭송하는 것은 그가 이를 통해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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