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낭독으로 <우상의 황혼>을 소리내서 읽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특히 많았는데 그 중에서 음악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오늘은 문자와 정신, 예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만한 구절들이 많았습니다.
아폴론의 세계란 빛의 세계이고 낮의 세계입니다.
의식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명료해서 흐릿하고 애매호모한 어떤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세계! 그렇기 때문에 아폴론적인 도취는 오로지 눈(visual)만을 흥분상태에 빠지게 만듭니다. 의식의 표현을 뚫고 나와서 형태를 갖게 되는 아폴론의 세계는 눈의 세계란 볼 수 있는 것, 측정할 수 있는 것, 계산 가능한 것으로 이뤄진 (화폐화된) 세계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시각적 감각이 지배하는 세계는 일종의 왜곡된 세계라는 거죠. 온 몸으로 세계와 감응하는 디오니소스적 인간들은 자신의 감정이 보내오는 신호에 민감합니다. 시각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세계를 마주했던 사람들히고, 명료하지 않고 흐릿하게 보이는 사물과 타자에 대한 자신의 감응을 비언어적으로 파악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폴적인 세계로 변모된 세계에서 애매모호한 감정들과 가시화할 수 없는 것들은 무시됩니다. 시각 이외의 감각들이 점점 더 메말라가기때문입니다. 니체가 말했듯이 현재의 음악은 분명 "감정들의 흥분이자 분출이지만 그것은 감정의 훨씬 더 풍부한 표현세계의 잔재에 불과"합니다. 시각 지배적 세계의 현대인들은 그리스인들이 '비극'을 보는 것처럼 음악의 강도를 느낄 수 없습니다. 음악을 충동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율과 가사로서만 이해할 뿐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신나는 음악을 들으면 마치 기계처럼 자기의 뜻과 다르게 몸을 움직이고 팔과 다리를 흔들며 박자를 탑니다. 음악을 이해하기보다는 소리가 직접적으로 '근육(신체)'에 작동하여 명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지러지게 울던 아이가 <아기 상어> 노래가 나오자마자 춤을 따라합니다. 반대로 현대의 성인들은 음악적 충동을 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습니다. 혹여라도 신나는 사물놀이 음악이나 힙합, 혹은 3박자의 왈츠 음악에 고개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놀라고, 발바닥으로 박자를 맞추며 흥얼거리다가 멈춰버립니다.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훨씬 넘어서" 있습니다.
니체의 말대로 "진정한 체험음 전혀 수다스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말과 문자'를 넘어서 흘러 내리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많이 말해도, 수 백 페이지의 책을 쓴다하더라도 지금 내가 듣는 음악적 감응을 전달할 수 없습니다. 말과 문자란 무한하게 넘쳐 흐르는 잉여들에서 건져낸 조각들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말과 문자를 넘어선 것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어화 된 것은 "오직 평균적인 것, 중간의 것, 전달할 수 있는 것"만을 표현할 뿐입니다.
여기에 예술의 위치합니다.
예술은 점점 더 시각화되는 세계 속에서 메말라져버린 다른 감각들을 일깨워줍니다. 꿈틀거리는 디오니소스적 도취가 다시 깨어날 수 있는 토대를 세워줍니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악기를 연주하고, 엉성한 모양이지만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것은 삶의 기폭제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어린 아이처럼 음악이 나올 때 모든 시선들로부터 자유롭게 몸을 흔들수 있습니다. 세계가 주는 그 풍부함 그대로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근육이 시키는대로 움직일 때 뭔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작게만 보이는 세계가 크고 반짝거리게 보일 겁니다.
--------------------------------------------
아폴론적인 도취는 무엇보다 눈을 흥분상태에 빠지게 하여 환상을 볼 수 있게 한다. ... 이에 반해 디오니소스적 상태에서는 감정체계 전체가 흥분되고 고취된다. 그래서 감정체계 전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표현수단을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표현, 모방, 변형, 변모의 힘, 모든 종류의 흉내내는 기술과 연기력을 동시에 발휘한다. 본질적인 점은 능락한 변신, 반응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능력이다. 디오니소스적 인간에게는 어떤 종류의 암시든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는 감정이 보내오는 어떠한 신호도 간과하지 않는다. 그는 최고의 전달 기술을 갖는 것과 똑같이 이해하고 알아차리는 데서도 최고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음악도 똑같이 감정들의 흥분이자 분출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감정의 훨씬 더 풍부한 표현세계의 잔재에 불과하며 디오니소스적인 연기술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음악을 하나의 독자적인 예술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은 몇 개의 감각을, 그 중에서도 특히 근육 감각을 작동하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인간은 이제 [음악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곧장 신체로 모방하거나 표현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느끼는 것을 신체로 모방하는 것이야말로 본래의 디오니소스적 정상상태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의 근원적 상태다. 음악은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는 능력들을 희생하고 그 상태를 서서히 특수화시킨 것이다.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中 112쪽)
진정한 체험이란 전혀 수다스럽지 않은 것이다. 그것들은 자신을 전달하고 싶어도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들에는 말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훨씬 넘어서 있다. 모든 말에는 일말의 경멸할 만한 점이 들어 있다. 언어는 오직 평균적인 것, 중간의 것, 전달할 수 있는 것만을 위해서 고안되었다. (128쪽)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독은 고된 육체적 노동 (2) | 2024.03.27 |
---|---|
낭독의 사유(思惟) 와 묵독의 사고(思考) - <우상의 황혼>을 읽고 난 후 (2) | 2024.03.13 |
<차라투스트라>를 낭독으로 다 읽은 후기 (0) | 2024.03.04 |
선물같은 사랑은 없다 (0) | 2024.02.22 |
새벽낭독 5일차 - 몸은 생각보다 빠르다 (1) | 2024.01.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