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같은 사랑은 없다.
만약 그 선물(프랑스어, don)이 한 점의 불순물없는 순수한 사랑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라면.
마르셀 모스는 1925년에 <증여론 Essai sur le don>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혹은 공산주의적 사회를 넘어서는 다른 삶의 양식으로서 주고, 받으며 답례하는 사회를 제안합니다. 언제나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살아왔던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사회!
북서아메리카의 인디언 부족과 남태평양의 멜라네시아 및 트로브리안드 군도 지역을 인류학적이고 사회학적으로 탐구하면서 현재의 화폐와 상품 교환이 아니라 선물을 주고 받고 답례하는 호혜성의 사회를 제시한다.
여기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축제이자 사건, 삶의 방식은 북서아메리카의 포틀래치와 남태평양의 쿨라다. 둘다 선물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는 개인간, 부족간, 더 크게는 섬과 섬 사이의 일종의 관계성이다. 고대사회는 주고 받고 답혜하기라는 준칙이 다양한 형식을 발명했으며 이를 행하면서 상호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신기하게도 이 선물을 주고 받고 답례하는 것은 자발적이면서 의무적이라고 말한다. 강제적이면서 자발적이다. 선뜬 이해가기 어려운 모순적인 말이다. 어떻게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행위가 자발적일 수 있을까?
우리 사회 바로 전에 있었으며 또 아직도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회에는, 심지어 현대의 대중적인 도덕의 많은 관행에서조차 중간은 없다. 완전히 믿거나, 아니면 완전히 의심하거나이다. 무기를 버리고 그 마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모든 것 - 일시적인 환대에서 딸과 재산에 이르기까지 - 을 주거나이다. 사람들이 점잔빼는 태도를 버리고 주고 답례할 의무를 질 줄 안 것은 이러한 상태에서이다.그들은 그럴게 할 수밖에 없었다. 두 집단이 만나는 경우 그들은 서로 피하거나 - 경계심을 나타내거나 도전하는 경우에는 싸우거나 - 아니면 잘 거래할 수밖에 없다.
......
트로브리안드 섬의 키리위나 사람들은 말리노프스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부 섬 사람들은 우리처럼 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잔인하고 인육마저 먹습니다. 우리가 도부 섬에 도착할 때에는 그들을 경계합니다. 우리를 죽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생강 뿌리를 씹어서 뱉으면 그들의 정신이 바뀝니다. 그들은 창을 버리고 우리를 환영합니다." 축제와 전쟁 간의 불안정한 관계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마르셀 모스 <증여론> 279~280쪽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 중간은 없다. 선물이라면 순수해야 하고, 화폐적 (상품)교환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순수한 선물(증여)도 완전한 사리사욕도 없다. 정말 좋아하는 친구에게, 혹은 몸과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연인에게 선물을 할 때도 순도 100%의 순수한 마음만이 작동할 수 없다. 선물을 주고 나서 곧바로 댓가를 바라거나 비슷한 선물을 돌려받으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그 선물을 받고도 아무런 태도의 변화도 따뜻한 말 한마디도 없다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려고 계속해서 선물을 준다면 그 관계는 어느 순간 파괴적으로 변한다.
또한 GS편의점에 들어가서 커피를 사고 정당한 돈을 주고 나올 때, 주인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잉여 없이 커피와 돈만이 교환될까? 신기하게도 이렇게 화폐와 상품의 교환이라도 계속되다보면 돈과 상품 이외의 것들이 나와 편의점주인 사이에 형성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생각해보면 관계성이란 언제나 이렇게 뭔가를 계속 주고받는 것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멜라네시아에서 행해지는 쿨라(Kula ring)를 생각해보자. 여기에는 음왈리와 술라바라는 선물이 섬과 섬, 부족과 부족, 개인과 개인 사이를 끊임없이 돈다.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자신이 받았던 음왈리와 술라바는 다음 섬, 다음 부족에게 전해진다. 음왕리와 술라바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부족 내부에서 끊임없이 주고, 받고, 답례하기의 행위들이 수행된다.
주고, 받고, 답례하기가 행해질 때는 항상 최대의 마음과 물질이 표현되어야 한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더욱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행위와 물건이 중요해진다. 거대한 축제가 열리고, 세밀한 동작으로 오랜시간 준비한 춤이 펼쳐지고, 평소에는 볼 수 없던 진수성찬을 준비한다. 처음 이 모습을 서양인들에게는 거대한 낭비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고 수준의 의례와 절차가 행해질 때 두 섬들, 두 부족들, 두 가족들 사이, 개인들 사이에 관계가 유지된다. 한치의 실수라도 벌어진다면 관계는 깨지고, 그 순간 전쟁이 시작된다.
선물이라는 말에 혼동되서는 안 된다. 직접 선물을 받고 답례해보면 알겠지만 선물을 주고 받고 답례하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다. 어떤 선물은 해주어야 하는지, 언제 해야 하는지, 선물을 줄 때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신경쓸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는 충분히 구체적인 의례가 없다면 선물을 하고도 관계는 더 나빠질 수 있다. 선물을 받고 답례하는 것 역시 어렵다. 특히 선물을 받고 나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선물을 답례해야하는지, 또 어떤 선물을 주어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하게 된다.
만약 이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면 당장에 인터넷에서 받은 선물의 가격을 확인하고 거의 즉시 그와 비슷한 선물을 주면 된다. 선물을 즉각적으로 돌려받은 사람 역시 직감적으로 느낀다. 이 사람이 나와 관계 맺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일정 수준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서로간의 신뢰를 상징한다. 가족들이나 친한 친구들간의 관계성은 끊임없이 주고 받는 사이에서 이루어지지만 그 사이 사이에는 결코 갚을 수 없는 빚들을 서로가 지고 있을 때 더 돈독해진다. 갚을 수 없는 빚들은 물질적일 수도 있지만 행위와 태도에서 더 많이 드러난다. 추운 어느 날 목도리를 빌려주었을 때, 너무 바쁘고 몸도 아펐지만 친구 장례식에 오랫동안 함께 있는 것과 같은 것들. 어느 순간 상호적인 빚짐이 없어진다면 관계는 끊어진다.
마르셀 모스는 바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삶이란 언제나 '의무'와 '자발성'의 혼합된 증여의 분위기 속에 있다는 것을. 인류사에서 이러한 주고 받고 답례하기가 끊어진 적은 없었고, 항상 시대에 맞게 재구성된 증여의 모습, 혼종이자 잡종처럼 보이는 증여의 잔재들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사랑 역시 그렇게 봐야하지 않을까.
순수한 선물이나 완전한 사리사욕은 없다. 마찬가지로 순전한 사랑이나 완벽한 이기심 혹은 미움은 없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일수록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고안해내야한다. 인디언 부족들이나 멜라네시아인들의 축제, 춤, 선물을 주고 받을 때의 의미 없어 보이는 의례와 절차들을 기억해야 한다. <아스달 연대기>에서 새로운 무녀가 춤동작을 배울 때 힘들어하면서 불평하기도 한다. 이런 손동작과 몸짓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가라고. 무녀의 춤은 단순히 아름다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서 공동체적인 결속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한 동작이라도 삐끗하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그에 걸맞는 배려, 예의, 절차가 필요하다. 고대사회들이 자신의 마음을 물질로 드러냈던 것처럼 마음을 물질적으로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내야 한다.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까운 사람 가족이나 친구일수록 더욱 더 예의를, 배려해야 한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아주 사소한 동작이나 말 한마디의 변화를 세밀하게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겉치레라는 말로 현재 우리들은 이전의 절차와 의례들을 모두 잃어버렸다. 그렇다면 마르셀 모스가 말했던 것처럼 2024년에 알맞는 새로운 의례, 절차, 주고 받고 답례하는 새로운 잡종을 발명해야 한다. 함께 밥먹는 것이 중요하다. 적어도 금요일 저녁 혹은 토요일 아침에는 다 함께 맛있는 밥 먹기. 축하할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 행하는 가족, 친구, 동료끼리의 의례를 만들어야 한다. 노래방에 가서 함께 노래부르기. 간단하지만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다 함께 춤추기. 신체성을 동반한 것이 중요하다. 편지를 주고 받는 것도 아주 좋은 혼종이 될 수 있고, 컴퓨터 게임을 함께 하는 것도 공동의 감각을 형성하는데 좋을 것.
서두에 선물같은 사랑은 없다고 했지만, 마르셀 모스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사랑은 선물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상대방과 함께 관계 맺고 싶은 마음, 사랑 역시도 자발적이면서도 의무적인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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